
제목 : Historic Centre of the Town of Goiás
설명 : © jmarconi
상세정보
국가 : 브라질(Brazil)
위치 : 고이아스 주(State of Goiás)
좌표 : S15 55 59.808, W50 8 0.096
등재연도 : 2001년
요약
고이아스(Goiás)는 18, 19세기에 브라질 중부의 식민지 역사를 증언하는 곳이다. 도시 건물의 배치를 보면 지역 조건에 적응·발전한 광산 도시가 유기적으로 개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공건물과 민간건물은 그 지역의 재료와 건축 양식을 일관되게 사용한 덕분에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영문명
Historic Centre of the Town of Goiás
등재기준
기준 (ⅱ) : 도시 건물의 배치와 건축 양식의 측면에서, 고이아스 역사 지구는 남아메리카 중부 지역의 기후와 지리, 문화적 제약을 훌륭하게 적응·발전시킨 유럽풍의 뛰어난 도시이다.
기준 (ⅳ) : 고이아스는 보존에 있어 그 지역만의 재료와 기술을 사용하여 보존에 힘쓰고 있다. 이로써 고이아스는 남아메리카 식민 정착지의 특징적인 도시 구조와 건축 양식의 발전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고이아스 마을의 기원은 브라질 내륙을 탐험하였던 공식 원정의 역사와 다소 밀접한 관련이 있다. 페르난두 디아스 파이스가 지휘한 탐험대는 1673년~1681년에 미나스 지역을 탐험하였고, 바르톨로뮤 부에누 다 실바가 지휘한 또 다른 탐험대는 1682년 고이아스 지역을 탐험하여 약간의 금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미나스의 광산이 더 우수하여, 1700년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8만 명이던 브라질의 인구는 백만 명을 넘어섰다.
해안 지역에서 있었던 전쟁의 결과, 사람들은 다시 내륙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에 따라 1718년 현재의 마토그로소(Mato Grosso) 주도인 쿠이아바에서 금이 발견되었으며, 3년 후 바르톨로뮤 부에누의 아들이 고이아스의 광산이 있는 리우베르멜루에서 금광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고이아스 광산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년 후 그는 산타나 정착촌을 세웠고, 1729년에는 이 지역에 성당이 들어섰다.
포르투갈 당국은 고이아스 금광들을 좀 더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지방 정부를 보강하기로 결정했다. 1739년 상파울루 총독은 고이아스의 빌라 보아에서 이름을 가져온 산타나를 선택했다. 광산촌은 그것에 작은 행정 구역을 추가하여 크기가 두 배가 되었다. 1748년 고이아스는 새로운 하부 행정 단위의 본부로 선정되었다. 첫 번째 총독은 1749년~1755년에 보통 마을을 작은 주도로 변화시킨 동 마르코스 데 노롱야(Dom Marcos de Noronha)였다. 최초의 건축물 중에는 광산에서 나온 금을 주조하던 푼디상(1750), 총독의 저택, 군대의 막사 등이 있었다. 카마라 및 카데이아 건물의 건축, 도로의 개선, 카리오카 및 차파리스 데 카우다 분수의 건설 및 극장의 건축 등을 포함하여 마을은 계속하여 개발되었다.
루이스 다 쿠나 메네세스(Luis da Cunha Meneses) 총독은 1778년~1783년 동안 나무를 심고 거리를 정비하였으며, 샤파리스 광장을 만들었으며, 도살장을 열었다. 1782년에는 오늘날까지 전해진 구조를 가지고 있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도시 종합 계획안을 마련했다. 1770년 불가피하게 금광 채굴이 쇠퇴하면서 고이아스는 장기간에 걸친 경제 침체를 겪었다. 주도의 지위는 여전히 가지고 있었지만 리우데자네이루보다 한참 뒤처져 있었으며, 더 이상의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1935년~1937년에 행정적 지위를 잃었지만, 마을의 모습은 여전히 잘 보존되어 있다.
1950년 브라질의 보존 기관인 국립역사예술유적원(IPHAN)은 주요 교회와 병영 막사, 1951년에 카마라 가옥과 저택, 역사 지구의 주요 지역을 유적 목록에 등재했다. 1960년 브라질의 새로운 수도가 브라질리아로 이전되자, 이 지역은 새로운 자극을 받았다. 1980년대 이후 고이아스는 몇몇 새로운 건축으로 활기를 되찾았다. 다행히 1978년 국립역사예술유적원(Historic and Artistic Heritage, IPHAN)은 고이아스 역사 지구 전체를 보호 지구로 등재했다.
유산면적
40㏊
완충지역
44㏊
참고번호
993
본문
도시 건물의 배치와 건축 양식의 측면에서 볼 때, 고이아스 역사 지구(Historic Centre of the Town of Goiás)는 남아메리카 중부 지역의 기후와 지리, 문화적 제약을 훌륭하게 적응 발전시킨 유럽풍 도시의 뛰어난 본보기이다. 고이아스는 지역에서 나는 재료와 기술을 충분히 사용하고 예외적인 설정을 절제함으로써 남아메리카 식민 정착지의 특징적인 도시 구조와 건축 양식의 발전을 보여 주고 있다. 도시 건물의 배치를 보면 지역 조건에 맞게 적응된 광산 도시가 유기적으로 개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공건물과 민간건물은 지역의 재료와 건축 양식을 일관되게 사용한 덕분에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이아스 마을의 기원은 브라질 내륙을 탐험하였던 공식 원정의 역사와 다소 밀접한 관련이 있다. 페르난두 디아스 파이스(Fernando Dias Pais)가 지휘한 탐험대는 1673년~1681년에 미나스(Minas) 지역을 탐험하였고, 바르톨로뮤 부에누 다 실바(Bartolomeu Bueno da Silva)가 지휘한 또 다른 탐험대는 1682년 고이아스 지역을 탐험하였다. 그 후 쿠이아바(Cuiabá)와 리우베르멜루(Rio Vermelho)에서 금이 발견되었다.
포르투갈 당국은 고이아스 금광들을 좀더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지방 정부를 보강하기로 결정했다. 1739년 상파울루 총독은 고이아스의 빌라 보아(Vila Boa)에서 이름을 가져온 산타나(Santana)를 선택했다. 광산 도시는 그것에 작은 행정 구역을 추가하여 크기가 두 배가 되었다. 1748년 고이아스는 새로운 하부 행정 단위의 본부로 선정되었다. 첫 번째 총독은 1749년~1755년에 보통 마을을 작은 주도로 변화시킨 동 마르코스 데 노롱야(Dom Marcos de Noronha)였다. 최초의 건축물 중에는 광산에서 나온 금을 주조하던 푼디상(Fundição, 1750), 총독의 저택, 군대의 막사 등이 있었다. 카마라(Câmara) 및 카데이아(Cadeia) 건물의 건축, 도로의 개선, 카리오카(Carioca) 및 차파리스 데 카우다(Chafariz de Cauda) 분수의 건설 및 극장의 건축 등을 포함하여 마을은 계속하여 개발되었다.
1782년에는 오늘날까지 전해진 구조를 가지고 있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도시 종합 계획안을 마련했다. 1770년 불가피하게 금광 채굴이 쇠퇴하면서 고이아스는 장기간에 걸친 경제 침체를 겪었다. 1935년~1937년에 행정적 지위를 잃었지만, 마을의 모습은 여전히 잘 보존되어 있다.
고이아스의 마을은 리우베르멜루라는 작은 강을 따라 2개의 언덕 사이에 건설되었다. 오른쪽 제방 지역은 북서쪽 언덕을 향한 급경사로 인구 밀집 지역이며, 전통적으로 노예를 위해 마련한 로사리오 성당이 위치하고 있다. 남동쪽 언덕에 가로막힌 왼쪽 제방 지역은 산타나의 교구 성당, 총독의 저택, 병영, 푼디상 주택을 포함하고 있고, 샤파리스 광장 쪽으로 확장되어 있으며, 샤페우두파드레(Chapeu do Padre) 언덕을 향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역사적인 주거 구역과 개성 있는 시장이 발견되었다.
이 마을은 건물의 비율과 유형 때문에 건축물의 조화가 두드러진다. 동시에 건축의 역사는 18세기의 고전적 건물에서 19세기의 종교 건축물까지 스타일의 다양성에서 찾을 수 있다. 고이아스는 19세기부터 최근까지 장기간 경제 침체를 겪어 왔다. 그래서 그런지 1933년에 고딕 재현 스타일로 로사리오 성당을 재건한 것 말고는 현대에 마을의 주요 부분을 개축한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고이아스는 자연 환경을 포함하여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18~19세기 광산 마을의 모습을 보여 주는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