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Old City of Acre
설명 : © UNESCO
상세정보
국가 : 이스라엘(Israel)
위치 : 서부 갈릴리(Western Galilee)
좌표 : N32 55 42, E35 5 2
등재연도 : 2001년
요약
아크레(Acre)는 페니키아 시대부터 계속 사람이 살아온, 역사적인 성곽 항구 도시이다. 18세기~19세기 오스만 제국 때 세운 요새 도시로 성채, 모스크, 대상(隊商)들을 위한 숙소(Khan El Umdan), 목욕탕 등 전형적으로 도시의 요소를 갖춘 점이 특징적이다. 1104년~1291년 십자군이 점령했던 마을의 터는 오늘날의 거리보다 위쪽과 아래쪽에 모두 거의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며, 중세 십자군 전쟁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수도 배치와 구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영문명
Old City of Acre
등재기준
기준 (ⅱ) : 아크레는 대표적인 역사적 항구 도시로, 현존하는 18세기~19세기 이슬람 요새 도시 아래 중세 십자군 건물의 중요한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기준 (ⅲ) : 아크레의 십자군 도시 유적은 예루살렘의 중세 십자군 왕국 수도의 배치와 구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기준 (ⅴ) : 오늘날 아크레는 성벽을 두른 오스만 제국 도시의 중요한 예로 성채, 모스크, 대상의 숙소, 목욕탕 등 전형적인 도시 요소를 갖추고 있다. 부분적으로 지하의 십자군 구조물 위에 세워졌으며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
페니키아 시대부터 계속 사람이 살았던 아크레 성지는 십자군 시대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천혜의 만으로 둘러싸인 반도에 위치한 아크레는 1104년~1291년 예루살렘의 십자군 왕국의 수도로, 그 뒤에는 십자군 성지의 주요 항구로 발달하여 국제적으로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아크레 항구 도시는 국제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주위의 성벽과 바다로 이루어진 물리적 경계로 밀집한 중세 도시의 특징을 갖게 되었다.
오랜 세월 사양길을 걷는 동안에도 아크레는 예루살렘을 찾아오는 기독교 성지 순례자들의 주요 출입 항구 역할을 하였다. 그 뒤 18세기에 오스만 제국의 이 지역 수도로 다시 한 번 번영을 누렸다. 아크레의 독특한 특징은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전형적인 오스만 제국의 도시 아래 사실상 전인미답 상태로 보존된 십자군 도시의 중요한 유적이라는 점이다. 아크레 유적은 최근 몇 년 동안 과학적인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다. 성벽을 두른 항구 도시의 현재 풍경은 좁고 구불구불한 거리와 세련된 공공건물, 멋진 주택들로 이루어진 이슬람식 도시 디자인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세 시대에 유럽과 극동 건축의 상호 교류를 보여주는 아크레 유적은 성채, 모스크, 대상의 숙소, 목욕탕을 비롯한 크고 뛰어난 건축물로 이루어져 있다.
완전성
유산의 경계에는 13세기 말 맘루크(Mamluk)의 점령으로 완전히 묻힌 십자군 아크레 성채의 주요 요소가 포함된다. 유산의 성벽은 오늘날 주로 지하에 있으며, 최근에야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잘 보존된 이들 유적에는 성벽, 막사, 거리, 골목, 요새, 공공건물, 종교 건물, 주택, 상점 등으로 이루어진 도시 생활과 건물의 구조와 더불어 지하 구조, 건축학적 세부 사항, 본래의 미장 공사, 석조 건축의 많은 부분이 포함된다. 건축 계획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으며 건축 기술과 재료는 정확히 결정되었다.
유산은 또한 십자군 도시에 세워진 오스만 제국 도시 터를 포함하며 이슬람 사회의 가치 체계를 반영하는 골목, 안마당, 광장의 도시 체제 형태를 취한다. 도시의 발달 과정을 결정하는 지질학적 상태는 오늘날까지 큰 변화 없이 본질적으로 18세기 오스만 제국의 항구 도시로서 완전성을 유지하고 있다. 아크레의 전체적 완전성은 관리 보존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곳에서 특히 취약하다.
진정성
십자군 시대와 오스만 시대 말기 등 역사의 주요 시대는 오늘날 아크레의 외관에 영향을 미쳤다. 도시 발달 과정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아크레는 공공건물, 대상의 숙소, 시장 주위의 종교 건물, 작은 상점, 큰 저택과 함께 도시 진입로이자 수입지로 활발히 활동하는 항구 도시의 특징을 갖게 되었다. 아크레의 개개 건물은 대부분 건립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며 마지막으로 150년~300년에 극소수만 개조되었다.
역사적 배경
고대 아크레는 옛 도시가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2.5㎞쯤 떨어진 텔 아코(Tel Akko)에 있었다. 텔 지방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약 3000년 초기 청동기 시대로 보인다. 기원전 1900년경 아크레는 바다 쪽에 벽돌로 만든 정문이 있는 높은 토벽으로 둘러싸인 요새가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아코는 아시리아(Assyrian)에 점령된 도시였다. 이어 기원전 9세기에 아시리아의 통치를 받았으며 기원전 6세기~4세기에는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 페니키아 도시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한 뒤 아크레 주위 지역은 처음에는 이집트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를 받았고 그 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배하였다.
기원전 3세기~2세기 반도에 세워진 현재의 도시는 건설자인 이집트 프톨레미 2세의 이름을 따서 안티오카 프톨레마이오스(Antiocha Ptolemais)라고 명명되었다. 지금도 이 시대에 만들어진 요새·성벽·탑이 있다. 아크레는 전략적 위치와 천연의 항구라는 점에서 국제 통상 중심지였다. 아크레는 기원전 1세기에 잠시 동안 유대의 마카베오가(하스몬가) 왕국에 속했으며, 기원전 63년 로마 제국의 수중에 들어가 콜로니아(colonia) 지위를 얻었다. 최초의 기독교 성지 순례자들은 아크레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갔다. 330년 비잔틴 시기 동안 아크레 지역은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이 시기에 아크레에는 교회 수백 개와 수도원이 성지 전역에 건설되어 경제적·인구학적으로 확장되었다.
더 큰 도시들은 확장되었고 새로운 요새 체제로 둘러싸였다. 아크레는 그 지역의 중요 항구로서 위치를 확립하였다. 초기 아랍 시대(638~1099) 본래의 이름 아코를 되찾은 도시는 카이로의 칼리프 영토의 일부가 되었지만 많은 도시가 버려지고 파괴되었다. 아크레는 국제적 항구로서 중요성을 잃었고 도시는 이슬람 해군 함대가 주둔하던 항구 주위의 몇몇 숙소로 축소되었다. 그 뒤 10세기~11세기에 경제적으로 다시 회복되어 항구와 도시 성벽이 재건되었다. 아크레에서 십자군 시대는 1104년에 시작되었으며 이후 예루살렘의 왕 보드앵 1세(Baldwin I)와 제노바의 통상 함대는 아크레가 십자군에게 넘어갈 때까지 육지와 바다로부터 아크레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제한된 자치체의 새롭고 특별한 형태의 정주지가 발달하였다. 보드앵 1세는 아크레 북부에 정착하여 요새화된 성을 건설하였다. 제노바, 베니스, 피사 상인들이 항구 근처에 자치 숙소를 건설하였다. 군대는 근처에 진영을 구축하였다. 십자군 통치 아래 2세기 동안 아크레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동서 문화 교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도시 북쪽에서 궁전 서쪽으로 요한 기사단, 도시 북서쪽에 템플 기사단, 동쪽 벽 근처에 게르만 기사단의 진영을 구축하였다. 다른 중요 숙소에는 아크레의 주요 성당 성십자가 교회가 세워진 이스라엘 민족 조상들의 숙소(Patriarch), 프랑스 상인(프로방스 숙소)의 숙소, 영국 상인의 숙소가 있다. 이슬람과 유대 상인들도 도시에 정주하였다.
공공건물이 많이 세워졌고 요새화된 건물, 교회, 목욕탕, 제과점, 궁정, 성지 순례자와 상인들을 위한 숙소 등이 시장을 형성하였다. 개인 주택도 건설되었다. 십자군이 점령한 2세기 동안 아크레는 부유하고 번성한 무역 도시로 발전하였다. 아크레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동서 문화 교류의 상징이었다. 1187년 하틴(Hattin) 와해와 십자군 궤멸로 이슬람교도가 전체 십자군 점령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아크레는 4년 동안 정복당했다. 사자왕 리처드가 이끄는 제3차 십자군 전쟁 때 아크레와 주변 연안 지역은 다시 정복되었다. 제2차 십자군 왕국은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하자 아크레를 수도로 정하였다. 북쪽의 몬미자르(Monmizar) 같은 새로운 이웃 지역이 건설되었고 아크레에는 새로 이중 성벽을 쌓았다.
서부의 양식이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 양식으로 바뀔 때 더 많은 궁전, 교회, 공공건물이 들어섰다. 이러한 양식 변화는 아크레에서 실행되었고, 최근 발굴 작업을 통해 양식의 변화 추이와 13세기 최초의 고딕 양식의 확립을 볼 수 있는 건물을 발견하였다. 맘루크 시대는 아크레 정복과 함께 1291년에 시작되어 1517년까지 계속되었다. 아크레는 가자(Gaza)의 맘루카(mamluka)에 속하게 되었다. 아크레는 항구 주변에 건물 몇 채만 남은 채 완전히 파괴되고 방치되었다. 18세기~19세기 오스만 제국 때 세워진 아크레의 건물은 십자군 도시 터를 뒤덮었으며 그 결과 십자군 유적이 보존되었다. 1799년 오스만의 지도자 아흐메드 엘 제자르(Ahmed El-Jazar)의 지휘 아래 나폴레옹의 오랜 포위 작전을 막아낸 뒤 아크레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1868년 바하이교 창시자 바하울라(Baha’ullah)가 오스만 제국의 죄수로 아크레에 도착하였다. 바하울라는 여생 24년을 아크레에 살면서 처음에는 도시의 요새에 수감되었으나 이후에는 옛 도시 골목의 작은 건물에서 가택 연금 상태로 살았다. 아크레에 머무는 동안 바하울라는 가장 중요한 책을 쓰고 바하이교 신자가 지켜야 할 율법과 계율을 만들었다. 바하울라는 1870년 말에 석방되어 아크레 성벽 밖의 근교 사유지에서 살았다. 바하울라는 1892년에 사망했으며 유해는 그가 살던 곳에 묻혔다. 오늘날 바하울라의 무덤은 바하이교의 가장 성스러운 사당으로 여겨진다.
보존 및 관리체계
아크레의 옛 도시는 1978년 유물 관련법에 따라 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1993년~2000년 유산에 초점을 둔 마스터플랜을 도시계획조정위원회가 제출하였다. 이로써 주위 완충지역을 설정하고 옛 도시와 항구 지역을 통합하였다. 유산은 아크레 지방 자치체로 행정 부서인 옛 아크레 개발 컴퍼니와 이스라엘 유물 당국이 공동 관리하고 있다. 이스라엘 유물 당국은 모든 개발 문제에서 지역 거주자에게 자문하고 허가와 보전 척도를 세운다. 당국은 아크레에 현장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아크레 현장 사무소는 유산 안에서 행해지는 공적 작업과 민간 작업을 감독한다.
아크레가 살아 있는 도시로 남을 수 있게 투자와 노력이 많이 들어가고 있다. 2001년 지역 주민과 함께 거주 숙소가 지표 부흥 프로젝트(Pilot Rehabilitation Project)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계속 확장되는데, 목적은 현대 생활에 필수적인 개조를 허용하면서 물리적 뼈대를 온전히 보존하는 척도 개발이다. 또 다른 목표는 지역 주민의 사회적·경제적 상태를 개선하여 아크레의 풍부한 유산에 대한 자존감을 강화하는 것이다. 아크레에 건설된 구조물을 유지하려면 지역 공동체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
유산면적
63㏊
완충지역
참고번호
1042
본문
아크레는 대표적인 역사 도시로, 현존하는 18세기~19세기의 이슬람 요새 마을 아래에 중세 십자군 때 건물의 중요한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의 중세 십자군 왕국 수도의 배치와 구조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현재 아크레는 성벽을 두른 오스만 제국 도시의 중요한 예이다. 성채, 모스크, 대상의 숙소, 목욕탕 등 전형적인 도시적 요소를 갖추었고 부분적으로 지하의 십자군 구조물 위에 세워졌는데,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다.
아크레는 19세기에 경제적으로 부흥하면서 모스크, 목욕탕, 대상의 숙소 등이 세워졌다. 부유한 상인들은 아크레에 거주하면서 동부의 19세기 말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대형 저택을 지었다. 1918년 아크레를 점령하고 국제연합 위임 아래 팔레스타인 지방을 통치하게 된 영국은 아크레 성벽 경계선 바깥 지역을 개발하여 거주지와 행정 건물을 세웠다. 근처의 근대적인 하이파(Haifa) 항구가 발달하면서 아크레 항구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독립한 뒤 옛 도시에는 소수의 이슬람교도만이 거주하였다. 전투가 뜸해지면서 다른 지역에서 온 많은 팔레스타인 아랍 난민이 옛 도시에 도착해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많은 유대인은 신도시에 정착하였다. 오늘날 지상과 지하에 11세기~20세기에 아크레의 변화무쌍한 역사의 매 시점에서 이루어진 문화적 요소가 복합된 놀라운 유적이 남아 있다. 성벽 안에 사는 주민 5,000명은 주로 아랍인이며, 약 80%는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에서 온 이주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