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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과 역사 지구 [University and Historic Precinct of Alcalá de Henares]

  • 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과 역사 지구
  • 제목 : 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과 역사 지구
  • 설명 : © UNESCO / Author : Yvon Fruneau
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과 역사 지구

상세정보

  • 국가 스페인(Spain)
  • 위치 마드리드 자치지방 및 주(Province and Autonomous Community of Madrid)
  • 좌표 N40 28 53|||W3 22 5
  • 등재연도 1998년
  • 등재기준

    기준 (ⅱ) : 알칼라 데 에나레스는 오로지 대학만이 들어서도록 설계되고 건설된 세계 최초의 도시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학문의 전당을 지을 때 참고해야 할 모델 역할을 해왔다.

    기준 (ⅳ) : 알칼라 데 에나레스는 이상적인 도시, 즉 ‘신의 도시’라는 개념이 최초로 그 실체로서 구현된 곳이다. 이 도시를 시발점으로 이상적인 도시 개념은 세계 전역으로 퍼지게 됐다.

    기준 (ⅵ) : 알칼라 데 에나레스가 인류의 지적 발전에 기여한 공헌으로는 ‘신의 도시’의 구현, 특히 스페인어의 정의에서 발생한 언어학적 발전과 이 도시의 위대한 아들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Miguel de Cervantes Saavedra)의 업적과 그의 걸작『돈키호테(Don Quixote)』를 들 수 있다.

요약
추기경 히메네즈 데 시스네로스(Jiménez de Cisneros, 1436~1517)가 16세기 초에 설립한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á de Henares)는 세계 최초의 계획된 대학 도시였다. 이 도시는 스페인 선교사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세운 이상적인 도시 공동체인 ‘키비타스 데이(Civitas Dei, 신의 도시)’의 전형이었다. 또한 유럽과 세계 다른 지역에서 생겨난 대학들의 모범이 되기도 하였다.
목차
참고번호
876
본문

알칼라 데 에나레스는 오로지 대학만이 들어서도록 설계되고 건설된 세계 최초의 도시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학문의 전당을 지을 때 참고해야 할 모델 역할을 해왔다. 알칼라 데 에나레스는 이상적인 도시, 즉 신의 도시라는 개념이 최초로 그 실체로서 구현된 곳이다. 이 도시를 시발점으로 이상적인 도시 개념은 세계 전역으로 퍼지게 됐다.

에나레스(Henares) 강 골짜기에 인류가 정착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였다. 이곳은 이베리아 반도(Iberian peninsula)의 정중앙이라는 전략적 위치에 있었으므로 필연적으로 로마 시대의 신도시 계획 양식(Roman town)인 콤플루툼(Complutum)이 세워졌다. 콤플루툼의 위치는 현재 도시 중심에서 약 1.5㎞ 떨어진 곳이다.

어린이 성인 유스투스(Justus)와 파스토르(Pastor)가 304년에 이곳에서 순교했으며, 훗날 콤플루툼의 성벽 바깥쪽에 있는 두 성인의 묘지는 성소가 됐다. 이 성소를 중심으로 현재의 역사 중심지가 조성되었다. 이곳은 서고트 왕조 시대 때 주교 교구였으며, 8세기 무어인들이 스페인의 대부분을 빠른 속도로 장악했을 당시에는 코르도바 에미레이트(Cordoba Emirate)의 일부가 되었다. 12세기에 콤플루툼에서 약 4㎞ 상류 지역에 ‘알칼라트(Al-Qal’at, ‘성채’라는 뜻)’라고 알려진 요새가 건설되었고, 요새를 중심으로 작은 촌락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무어인들로부터 1118년에 탈환한 알칼라(Alcalá)의 땅은 톨레도(Toledo) 대주교에게 하사됐다. 그 후 여러 대주교가 거쳐갔으며 요새화된 마을은 중앙의 대주교 궁과 함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도시는 확대되었다. 도시 남쪽에는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교인 구역이, 동쪽에는 유대인 구역이, 북쪽에는 아랍인 구역이 있었다. 유대인 구역에는 전랑(前廊)이 있는 마요르 대로(Calle Mayor)가 놓여 있었다. 오늘날 세르반데스 광장이 있는 곳은 도시의 동쪽 끝에 개방공간이었으며 이곳은 1년에 1회씩 박람회와 경기가 열린다.

15세기 말에 산 디에고 프란체스코회 수도원(Franciscan Convent of San Diego)의 담장 바깥이 개발됐고, 그에 따라 수도원 주변에 마을이 조성되면서 도심이 확장되었다. 나바르(Navarre) 왕의 잇단 공격을 받은 후에는 튼튼한 성벽으로 도시의 남쪽과 동쪽으로 확장되어 에워쌌다. 도시는 칙령에 의해 유대인들이 스페인에서 추방되던 1496년까지 번창했고, 유대인들이 떠나면서 동시에 그들의 상업 활동도 중단되었다. 하지만 도시 구조는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남았고, 그 결과 새로운 대학 도시를 세우는 게 가능했다.

대학도시는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 추기경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오늘날 지역의 중심지가 된 자리에 처음 콜레히오 데 산 일데폰소(Colegio de San Ildefonso)를 세우면서 도시를 건축했다. 이 건물은 플라테레스크(Plateresque) 양식 건축물의 대가 중 한 명이었던 로드리고 힐 데 온타뇬(Rodrigo Gil de Hontañón)에 의해 1537년~1553년에 지어졌다. 콜레히오 데 산 일데폰소는 그리스도교와 학문, 황제의 권력 사이의 조화로운 통합을 상징하며 정교하게 장식된 웅장한 외관으로 유명하다.

볼로냐, 옥스퍼드, 파리, 살라망카 같은 유럽의 다른 대학 도시들과는 다르게, 알칼라 데 에나레스는 주변 도시의 환경에 맞춰 가며 서서히 개발된 도시가 아니다. 애초부터 시스네로스 추기경은 알칼라를 하나의 독립된 도시로 구상했다. 그는 부분적으로 버려진 중세 도시를 건네받아 이를 대학의 기능에만 초점을 맞춘 도시로 탈바꿈시킬 생각이었다. 이 구상에 따라 교수와 학생들이 머무를 주택들이 조성됐고, 하수 시스템과 포장도로 같은 공공 서비스가 제공되도록 했다.

작은 예배당이었던 성 유스투스 예배당(Chapel of St Justus)은 교회의 모습으로 재건되어 ‘마히스트랄(Magistral)’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교회의 참사회 회원들은 대학교의 선생들(Magistri)이 되었다. 대학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나 결국 25개의 콜레히호 메노레스(Colegios Menores, 소대학)가 건립됐고, 도시에 있는 8개의 대규모 수도원들 역시 단과대학이 되었다. 이와 같은 ‘대학교-단과대학(university colleges)’과 ‘수도원이 운영하는 대학교(university convents)’라는 모델은 스페인의 다른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신대륙에서도 광범위하게 채택되었다. 1509년에 제정된 신특권법에 따라, 시스네로스 추기경은 자신의 구상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법률적 틀을 마련했다.

대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교회와 스페인 제국의 행정관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콤플루텐세 다국어 성경(Complutense Polyglot Bible, 1514~1517)』은 알칼라에서 어떤 종류의 작업들이 이뤄졌는지를 보여 준다. 완성되기까지 10년이 소요된 콤플루텐세 다국어 성경은 근대적 언어 분석의 토대를 세웠으며, 동시에 사전 구조의 모델이 된 조판술(typography, 組版術)의 걸작이기도 하다.

이에 앞서 안토니오 데 네브리하(Antonio de Nebrija)는 1492년에 최초의 유럽 문법 책인 로망스어 문법서인 『카스티야어 문법서(Gramática de la Lengua Castellana)』를 세상에 내놓았다. 네브리하의 문법서는 유럽 언어들과 아메리카 원주민어 문법서 같은 비슷한 종류의 책들의 모델이 됐다. 알칼라에서 입안되고 공포된 인도 제국의 새 법률 역시 이곳 대학교의 법학부가 노력해서 이룬 결과였다.

교회가 알칼라를 모델로 삼아 마드리드에 대학과 수도원 학교들을 건립한 이래로, 16세기에 12,000명이 넘던 학생수가 17세기 중반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1836년까지 이어졌다. 교회와 대학교의 재산이 멘디사발(Mendizabal)에 의해 몰수되자 대학교는 1836년에 마드리드로 이전했고,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Complutense University of Madrid)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 후 1974년에 이 대학교는 알칼라에 경제학부를 설립했고, 오늘날의 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대학교를 구성하는 역사적인 건축물과 도시 자체의 구조가 한때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칼라 시민들 스스로의 노력과 행동으로 건물들과 도시 구조가 보존될 수 있었다. 그 예로 ‘공동소유주회(Sociedad de Condueños)’가 취한 독특한 행동 방침을 들 수 있다. 공동소유주회는 대학 건물 대부분을 샀고, 그 후 시에 되돌려 주기 전까지 대학 건물들을 때로는 텅 빈 상태로 놔둔 채 보존했다. 몇몇 건물들이 군사적 용도로 바뀌기는 했지만, 대체로 중요한 특징들은 훼손되지 않았다.

1856년에 철도의 도래와 함께 도시가 팽창하기 시작했지만, 1960년대 전까지 크게 개발되지는 않았다. 스페인의 다른 지역 사람들이 산업 중심지로 부상한 이곳으로 대거 이주한 1960년대에 와서야 이 도시는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개발은 대체로 무계획적으로 통제받지 않는 상태로 진행됐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때까지 공동소유주회와 군대의 소유였던 역사적 중심지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1968년에 이곳은 역사 지구로 지정되었고, 이때부터 좀 더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대학을 돌려줘야 한다는 요구는 1970년부터 시작됐다. 마드리드에 있는 대학교가 그 명칭에 ‘콤플루텐세(Complutense)’을 넣어 사용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1974년에 그 대학교는 알칼라에 경제학부를 설립했고, 3년이 지난 후에 현재의 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교를 개교했다. 군용으로 사용되던 수도원 대학을 원래 용도로 수리하고 복원한다는 약정이 1985년에 체결되었으며, 공동소유주회는 시스네로스 추기경의 구상으로 지어진 7개 건물을 양도했다. 다른 역사적인 건물들도 구매되어 대학에 통합되거나, 혹은 대학과 관련된 문화적 기능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 및 역사 지구는 세르반테스(Cervantes) 광장에서 시작해서 도시의 동쪽으로 펼쳐져 있다. 이 지역의 일부를 붕괴된 중세 시대의 담장이 에워싸고 있는데, 새로운 도시 개발과 함께 담장의 연장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중세 지구의 중앙에는 고딕 양식 건축물인 마히스트랄 대성당(Iglesia Magistral)이 자리 잡고 있다. 성당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는 도로망은 옛 유대인 구역과 아랍인 구역에서 다시 만난다. 동북쪽에는 자체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주교 구역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 대주교 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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