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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탑 [Tower of London]

  • 런던 탑
  • 제목 : 런던 탑
  • 설명 : © UNESCO / Author : Francesco Bandarin
런던 탑

상세정보

  • 국가 영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 위치 잉글랜드(England)|||타워햄리츠 런던 자치구(London Borough of Tower Hamlets)
  • 좌표 N51 30 29|||E0 4 34
  • 등재연도 1988년
  • 등재기준

    기준 (ⅱ) : 정복왕 윌리엄 시대 이후 왕권의 상징적 기념물이 된 런던 탑은 11세기 말부터 영국 전역에 걸쳐 훌륭한 선례가 되었다. 많은 아성(牙城, 예전에 성의 일부이던)들이 런던 탑의 예를 따라 돌로 지어졌다. 그중에는 콜체스터(Colchester), 로체스터(Rochester), 헤딩험(Hedingham), 노리치(Norwich), 와이트(Wight) 섬의 캐리스브룩(Carisbrooke) 성 등이 있다.

    기준 (ⅳ) : 화이트 타워는 11세기 말 노르만 왕실 성의 뛰어난 본보기이다. 런던 탑 건물들은 중세 군사 건축사의 주요 참고 자료이다.

요약
육중한 화이트 타워(White Tower)은 영국 전역에 세력을 떨쳤던 노르만 군사 건축의 전형적인 본보기이다. 화이트 타워는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이 런던을 방어하고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템스 강변에 건설하였다. 화이트 타워 주변에 지어진 다채로운 역사를 간직한 위풍당당한 요새 런던 탑(Tower of London)은 왕권의 상징물 중 하나이다.
목차
특징

1066년 정복왕 윌리엄이 세운 런던 탑은 다음과 같은 문화적 특징으로 인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 런던 시의 방어와 통제를 위한 경계 표지로서의 런던 탑
수도 런던으로 진입하는 통로인 런던 탑은 사실상 새로운 노르만 왕국으로 들어가는 통로였다. 템스 강 굽이에 전략적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런던 시의 커 가는 힘과 군주의 권력 사이의 중요한 경계선으로 작용했다. 런던 탑은 그 방어적 구조와 수비대를 통하여 도시를 방어하고 시민들을 통제하는 두 가지 역할을 함께 수행하였다. 19세기까지 런던 탑은 주변 지역보다 눈에 띄게 '높았다'.

• 노르만 권력 상징으로서의 런던 탑
런던 탑은 노르만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런던 탑은 다른 어떤 건물보다 11세기 중반 노르만의 영국 정복에 따른 광범위한 영향력을 대변하고 있다. 영국 정복으로 노르만은 유럽과 더 긴밀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고, 영국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국인 영국을 탄생시키는 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 11세기 후반 혁신적인 노르만 군사 건축의 탁월한 본보기
현재 유럽에 남아 있는 11세기 요새 궁전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화이트 타워와 13세기 후반과 14세기의 부속 건물들은 당시 국제적으로 군사 건축 기술의 첨단에 있던 여러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화이트 타워는 노르망디(영국 해협에 면한 프랑스 서북의 지방)에서 시작되어 노르만 영토를 거쳐 잉글랜드와 웨일스로 전파된 정교한 성(城) 건축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 11세기에서 16세기까지 발전한 중세 요새 궁전의 본보기
헨리 3세와 에드워드 1세 때 지은 부속 건물과 특히 요새 내 궁전의 매우 혁신적인 발전으로 런던 탑은 13세기와 14세기 초 유럽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영향력 있는 성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중 많은 건물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비록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16세기 직전까지도 궁전 건물을 왕실 건물에 부속하여 지었다. 런던 탑의 현존하는 궁전 건물들을 통해 중세 군주들의 요새 내에서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런던 탑은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왕실 건물들의 지속적인 발전과 변화를 보여 주는 드물게 남아 있는 건축물로서, 국가적으로나 국제적으로 그 중요성이 크다.

• 국가 제도와의 관련성
이후 군주들은 런던 탑을 지속적으로 활용하여 국방, 기록, 화폐 제도와 같은 근본적인 역할이 포함된 몇몇 주요 국가 제도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런던 탑은 13세기 후반부터 공공문서와 국왕 소유의 귀중품을 보관하는 장소가 되었다. 17세기부터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왕관 보석(Crown Jewels)을 통해 런던 탑이 왕실 물품의 보관소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유럽 역사에서 역사적인 주요 사건의 무대
런던 탑은 유럽과 영국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의 무대가 되어 왔다. 역사적 사건이 펼쳐졌던 현장이라는 의미야말로 런던 탑이 상징적인 건축물로서 누리는 지위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요소일 것이다. 노르만 정복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로서의 화이트 타워는 당시 새롭게 부상하던 질서의 힘과 번영을 상징하였다.

15세기에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이, 이후 16세기에는 앤 불린(Anne Boleyn),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 제인 그레이(Jane Gray), 엘리자베스 1세 등 4명의 영국 여왕이 이 탑에 투옥되었다. 그중 엘리자베스 1세를 제외한 나머지 3명이 타워 그린(Tower Green)에서 처형당했다. 이는 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이곳에 투옥되었던 가톨릭 신자와 신교도 가운데 살아남은 이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기록한 뒤부터 런던 탑은 사람들 사이에서 고문과 처형의 장소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또한 영국의 종교 개혁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번호
488
본문

육중한 화이트 타워는 11세기 후반 노르만 군사 건축의 전형적인 본보기이다. 런던 탑 건물들은 영국 전역에 이와 같은 많은 석조 아성이 지어진 것으로 보아 중세 군사 건축사의 주요 참고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런던 탑은 또한 11세기 정복왕 윌리엄 시대 이후 왕권의 기념비적인 상징이 되어 왔다.

왕권의 상징이자 수많은 역사 이야기를 간직한 당당한 요새가 화이트 타워 주변에 건축되었고, 이로써 영국 전역에서 그 영향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1066년 크리스마스날, 헤이스팅스(Hastings)에서의 승리 이후 정복왕 윌리엄은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정복왕 윌리엄은 바다에 면한 가장 취약한 방향에서 도시를 장악하기 위하여 재빨리 고대 로마 성벽의 남동 귀퉁이에 있는 인공 흙 둔덕 위에 흙과 목재로 아성을 지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정복왕 윌리엄은 이 전통적인 방어 설비를, 이후 런던 탑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는 웅장한 석조 건축물인 일종의 왕궁 요새로 대체하였다.

1080년대에 건축된 뒤 수세기 동안 개축되어 오는 과정에서, 현재 ‘화이트 타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 건물은 7.3㏊가 넘는 요새, 안마당, 건물들의 중심 건물이 되었다. 그리고 전체 건물을 통틀어 ‘런던 탑’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사실 ‘런던 탑’이라는 이름은 본래 1076년에 지은 아성에만 국한되었던 이름이다. 하얗게 칠한 벽 때문에 화이트 타워로 불리는 이 건물은 그 당시의 노르만 건축을 잘 보여 주는 사례로서, 건축 설계의 대담성이 매우 독특하다. 영국 군주국 역사의 비극적인 순간들이야말로 전체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지 모른다. 예컨대 블러디 탑(Bloody Tower)에서는 1483년 에드워드 4세의 아들들이 암살당하였다.

인상 깊은 평행육면체 덩어리인 화이트 타워는 둔덕보다 27m나 위로 솟아 있다. 육중한 성벽은 켄트(Kent, 잉글랜드 남동부의 주) 지방의 석회암으로 만들었고, 정복자의 노르만 영지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들여온 캉(Caen, 프랑스 서북부)의 돌로 모퉁이와 문 주위, 창문과 화살 구멍에 마름돌을 쌓았다. 내부의 아성은 크게 3개 층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예배당을 포함한 왕실의 주택이자 방어 시설이라는 두 가지 필요를 함께 충족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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