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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가드 고고 유적 [Timgad]

  • 팀가드 고고 유적
  • 제목 : 팀가드 고고 유적
  • 설명 : © UNESCO / Author : Yvon Fruneau
팀가드 고고 유적

상세정보

  • 국가 알제리(Algeria)
  • 위치 바트나 주(Wilaya province of Batna)|||팀가드(Commune of Timgad)
  • 좌표 N35 27 0|||E6 37 59.988
  • 등재연도 1982년
  • 등재기준

    기준 (ⅱ) : 로마의 군사 기지로, 모범적인 도시 계획과 특정한 형태의 민간 건물, 군사 건축물 등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은 로마의 중앙 세력이 고대 알제리의 고원 지대를 식민지화하는 데 활용한 사상과 기술, 전통의 중요한 연관 관계를 반영한다.

    기준 (ⅲ) : 격자 도시 계획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식 도시 계획의 지침을 적용해 건설한 도시 모형의 전형적 사례이다. 군사 기지로서의 초기 계획은 계속 유지되면서 그 후로도 이 유적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에는 사라진 로마 문명의 군사 기술자들이 보유했던 독창적 건축 기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기준 (ⅳ) : 팀가드 고고 유적은 3세기 동안 로마가 북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면서 형성된 도시와 그 역사를 보여 준다. ‬다양한 상징들로 구성된 건축학적 요소를 풍부하게 지니고 있으며, 방어 체계뿐 아니라 공공의 편의를 위한 건축물과 종교 건물 단지 등은 이 유적이 건설된 다양한 역사적 단계와 연관되어 있다.

요약
아우레스(Aurès) 산맥의 북쪽 경사면 불모지에 있는 팀가드 고고 유적(Timgad)은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117)가 100년 무렵에 군사 식민지로 건설한 도시이다. 정사각형 형태의 도시 구조로 되어 있으며, 남북 대로인 카르도(cardo)와 동서 대로인 데쿠마누스(decumanus)가 직각으로 교차 설계되어 있는 팀가드의 도시 구조는 로마식 도시 계획의 훌륭한 사례이다.
목차
탁월한 보편적 가치

아우레스 산맥 북쪽의 아름다운 산지에 있는 팀가드 고고 유적은 알제리의 수도인 알제에서 남동쪽으로 480㎞, 콩스탕틴(Constantine)에서 남쪽으로 110㎞ 떨어져 있다. 불모지에 세운 로마 군사 식민지의 완벽한 사례로서 제3아우구스투스 군단의 주둔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단은 그 후에 람바이시스(Lambaesis, 지금의 람베사)로 이동했다.

대단히 정밀하게 배치된 도시 계획은 전성기 로마식 도시 계획을 보여 준다. 2세기 중반부터 도시가 급속히 발달해 성벽의 경계를 넘어 도시가 발전하였다. 팀가드는 성벽의 경계를 넘어 확장되었다. 새로운 구역에 카피톨리움, 사원, 시장, 목욕탕 등의 주요 공공건물들이 건설되었다. 이러한 건물의 대부분은 이 도시의 황금 시대였던 세베루스 황제의 통치기에 건설되었는데, 대규모의 개인 주택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강력하고 번영하는 식민지로서, 팀가드는 누미디아 영토에서 로마의 웅장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건물들은 전체가 석재로 건설되었는데, 로마 제국 시기에 종종 재건되었다. 예를 들면 트라야누스 황제 개선문은 2세기 중반에, 동쪽 성문은 146년에, 서쪽 성문은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치하에서 재건되었다. 거리는 큰 사각형의 석회암 석판으로 포장되었으며, 아직까지 남아 있는 14개의 목욕탕에서 증명되듯 공공 편의의 제공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크기의 주택들은 값비싼 대리석을 대신해 고급스럽게 보이도록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했다. 기독교 ‬시기에 ‬팀가드는 유명한 주교 교구였다. ‬430년에 있었던 반달족의 침공 이후, 5세기 말 무렵에 팀가드는 아우레스의 산악족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539년에 비잔티움 제국의 재정복으로 인해 이 도시는 몇몇 활동을 재개하였다. 팀가드는 로마의 기념물에서 제거된 블록을 재사용하여 남쪽으로 향한 요새를 건설하였고, 이 요새에 의해 도시가 방어되었다. 아랍 인의 침공은 탐무가디(Thamugadi)의 최종적인 파멸을 야기했고, 이 도시에는 8세기 이후에는 거주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완전성

팀가드 고고 유적의 경계에 대해 명시하는 설명이 제출되어 검토가 필요한 상태이다. 도시의 흔적 전체가 경계 내에 포함될 예정이지만, 적절한 완충 지역이 고려되고 있다. ‬지진이나 기상 악화 등의 자연 현상이 이곳 유적지에 영향을 미친 적은 거의 없으며, 이 점은 팀가드 유적지의 놀라운 완전성을 보여 준다.

매년 열리는 문화 축제에는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 연약한 구조물에 올라가 짓밟거나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취약한 구조물 근처를 차들이 반복해서 지나가기도 하여 관리에 문제가 있다. 낙서와 쓰레기 문제도 이 유적을 관리, 보존하는 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문화부장관은 팀가드 연례 축제 행사와 관련된 활동들을 유적지 밖으로 옮기게 했고, 이로써 유적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완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속적인 발굴과 함께 진행된 복원 작업은 기념물의 완전성을 변질시키지 않았지만, 현재 이곳은 보존, 관리 노력의 부족과 과도한 이용으로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다.

진정성

유적의 흔적과 발굴된 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로 팀가드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거주민들이 고대 유적을 떠났고, 1881년부터 1960년까지 고고학적 발굴이 거의 끊임없이 지속된 덕분에 이곳에는 현대 건물이 건축되지 않았다. 만약 현대의 건축 기계와 장비들이 사용되었다면 이곳의 고대 유적은 손상되었을 것이다.

보존 및 관리 체계

팀가드의 고고학적 유적은 보호 및 전시 계획(PPMVSA)에 따라 관리되는데, 이 계획은 유적지에서 보존과 관리 조치를 수립하는 법적이고 기술적인 방침이다. 유적지를 관리하는 조직은 문화유산관리실(OGEBC)이다. 이 조직은 보호, 유지, 전시, 홍보 프로그램의 개발과 문서화 등에 관련된 모든 활동을 실행한다. 문화유산관리실은 문화유산에 대한 서비스를 책임지는 윌라야 지방정부의 문화관리국과 협조해 유적지에 대한 보호와 관리 프로그램을 시행한다. 법적인 관리 체계는 법률 ‘90-30(지방법)’, ‘98-04(문화유산보호관련법)’, ‘90-29(도시계획 및 개발관련법)’, 1998년에 제정된 팀가드 공동체의 개발과 도시 계획 기본 계획(PDAU)으로 구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구조물과 유산의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방문객의 수와 자동차에 대한 규제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협약 당사국은 좀 더 나은 보존과 전시를 위해서 유적지에 관련된 법률과 행정 규정을 개정하려 하고 있다.

유산면적
91㏊
참고번호
194‬
본문

아우레스 산맥 북쪽의 아름다운 산지에 있는 팀가드 고고 유적은 불모지에 세운 로마 군사 식민지의 완벽한 사례로서 트라야누스 황제가 서기 100년에 ‘탐무가디’라는 이름으로 건설하였다. 각 면이 355m인 정사각형의 성벽 내부에 있는 도시의 배치는 동서대로와 남북대로를 근간으로 세밀한 직각의 격자 형태이며 두 대로가 도시를 관통한다. 이러한 로마식 도시 계획은 로마 전성시대의 훌륭한 사례이며, 누미디아 영토에서 ‘웅장한 로마의 이미지’를 강력하게 실현하였다.

동서대로는 테베스테(Theveste, 지금의 테베사)에서 람베시스에 이르는 군사로의 축을 따랐다. 그 결과 같은 크기를 가진 집단 주택들이 건축되어 있다. 그러나 남쪽 지역에는 대규모의 공공건물터를 잡기 위해 격자 형태로 짓지 않았다. 남쪽 지역에는 포럼과 바실리카, 쿠리아 집회소 등의 부속 건물, 사원, 3,000석 규모의 극장, 시장과 목욕탕 등의 공공건물이 있다. 북동 구역에는 다른 목욕탕과 공공 도서관이 있었고, 집단 주택들과 연결되는 남북 대로를 향한 입구가 있었다.

2세기 중반부터 도시가 급속히 발달해 성벽의 경계를 넘어 도시가 발전하였다. 팀가드는 성벽의 경계를 넘어 확장되었다. 새로운 구역의 서쪽과 남쪽에 카피톨리움, 사원, 시장, 목욕탕 등의 주요 공공건물이 건설되었다. 이러한 건물의 대부분은 이 도시의 황금 시대였던 세베루스 황제의 통치기에 건설되었는데, 세르티우스의 저택 및 헤르마프로디테(Hermaphrodite)의 저택과 같은 대규모 개인 주택들이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제국 초기에 건물들은 자주 재건되었고, 거리는 큰 사각형의 석회암 석판으로 포장되었으며 공공 편의를 위해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크기의 주택들은 값비싼 대리석을 대신해 고급스럽게 보이도록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했다. 기독교 시대에 이곳은 주교 교구였으며, 4세기 말에 오프타트(Optat) 주교가 이단인 도나투스파(Donatist)의 대변인이 되면서 유명해졌다. 430년에 반달족의 침공을 받아 도시는 몰락하였고, 5세기 말경 토착민인 아우레스 산악족(Aurès mountain)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러나 539년에 비잔티움 제국의 재정복으로 도시의 기능이 잠시 살아났지만, 아랍인의 침공으로 도시는 결정적으로 파멸했다. 8세기 이후에는 사람들이 완전히 떠나 도시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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