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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타니야 [Soltaniyeh]

  • 제목 : 술타니야
  • 설명 : © UNESCO / Author : Babak Sedighi
술타니야

상세정보

  • 국가 이란(Iran, Islamic Republic of)
  • 위치 잔잔 주(Zanjan province)
  • 좌표 N36 26 7.008|||E48 47 48.012
  • 등재연도 2005년
  • 등재기준

    기준 (ⅱ) : 울자이투 영묘는 셀주크 왕국의 고전주의에서 티무르 왕국까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이슬람 건축 발달과 본질적인 연관이 있다. 이것은 특히 이중 돔 구조, 장식에서 정교한 자재와 주제의 사용과 관련이 있다.

    기준 (ⅲ) : 술타니야는 일한국의 고대 수도로서 13, 14세기 역사를 대변하는 대표적 유적이다.

    기준 (ⅳ) : 울자이투 영묘는 특히 일한국 시대의 페르시아 건축 발달의 뛰어난 성과를 대표한다. 혁신적인 공학 구조, 공간 비례, 건축 형태, 장식적인 패턴과 기술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요약
몽골 인이 세운 일한국(Ilkhanid dynasty)의 수도 술타니야(이란의 고대수도)에 있는 울자이투(Oljaytu)의 영묘로 1302년~1312년에 건설되었다. 울자이투의 영묘는 페르시아 건축 양식의 본보기이자 이슬람 건축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기념물이다. 팔각형 건물이 8개의 첨탑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터키옥으로 덮인 50m 높이의 돔 지붕이 있다. 이는 이란에서 현전하는 것들 중 가장 오래된 이중 구조의 돔 지붕이다. 영묘 내부 장식도 훌륭하다. 이란의 철학자 A.U. 포페(A.U. Pope)는 술타니야의 영묘를 일컬어 ‘타지마할을 예견한(anticipating the Taj Mahal)’ 건물이라고 극찬했다.
목차
역사적 배경

13세기 페르시아는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초토화되었다. 그들은 1258년 바그다드를 점령하여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를 끝장냈다. 그들은 또한 현재 이란의 북서부에 있는 타브리즈를 수도로 삼아 페르시아에 일한국을 건설했다. ‘일한(ilkhan)’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위대한 칸과 달리 ‘종속된 또는 평화로운 칸(subordinate or peaceful khan)’을 의미한다. 1294년 쿠빌라이 칸이 죽자 일한국은 이슬람으로 전환되었으며, 중국과의 관계도 약화되었다. 일한국 왕조는 1335년까지 페르시아를 통치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적어도 기원전 제1천년기부터 술타니야 유적지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1290년경 일한국이 세워지고 나서야 거주지가 건설되었다. 페르시아의 네 번째 몽골 통치자인 아르쿤 칸은 이 지역에 여름 별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사냥터와 말먹이가 풍부한 초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 카잔 칸은 지금 타페 누르로 알려져 있는 그의 무덤 위에 영묘를 짓게 했다. 새로운 거주지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나중에 술탄 무하마드 코다반데가 되는 울자이투가 1304년에 왕위에 올라 도시를 확장하고 수도로 삼아 ‘제국’을 뜻하는 술타니야로 이름을 정했다. 타브리즈와 함께 술타니야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무역로의 주요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주요한 건설은 1313년에 모두 끝났다.

일한국은 시아파(Shi’ism)로 개종했고, 그들은 4대 칼리프 알리(Ali)와 그의 아들 후세인(Hussein)의 유골을 바그다드에서 술타니야로 옮기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 대신 사당을 울자이투의 영묘로 만들었다. 1316년에 울자이투가 죽고 나서 술타니야는 중요한 도시로서의 지위를 잃었고, 나중에 작은 지방 왕조의 손에 넘어갔다. 1384년 타메를란의 군대가 술타니야를 점령하고 약탈했지만 울자이투의 영묘는 그대로 남았다.

그 후 술타니야는 여전히 타브리즈에 무역 중심지 기능을 담당했지만 수난을 겪었다. 16, 17세기에 술타니야는 점차 쇠퇴하여 폐허로 남았다. 그 터에 작은 도시 마을이 건설되었을 뿐이다. 19세기에 울자이투의 영묘를 일부 발굴했다. 동시에 초원은 카자르 왕조의 군대 훈련 캠프로 사용되었다.

유산면적
790㏊
완충지역
350㏊
참고번호
1188
본문

일한국의 고대 수도인 술타니야(Soltaniyeh)는 13, 14세기 역사를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도시이다. 이곳에 있는 울자이투의 영묘는 셀주크 왕조의 고전주의에서 티무르 왕조까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이슬람 건축 양식의 발달과 본질적으로 관련이 있다. 특히 이중 돔의 구조와 장식에 사용한 정교한 자재와 주제가 그렇다. 이것은 혁신적인 공학 구조, 공간 비례, 건축 형식, 장식적 패턴과 기술로 인해 뛰어난 평가를 받고 있다.

술타니야는 이란 북서부에 있는 테헤란에서 240㎞ 떨어진 곳에 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유적은 적어도 기원전 제1천년기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주지의 건설은 일한국 때인 1290년에야 시작되었다. 페르시아를 다스린 네 번째 몽골 통치자 아르쿤(Arqun) 칸은 이 지역에 여름 별장을 짓기로 했다. 좋은 사냥터가 많고 말에게 먹일 풀이 풍부한 초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 카잔(Qazan) 칸은 현재 타페 누르(Tappeh Nur)로 알려진 그의 무덤 위에 영묘를 짓게 했다.

나중에 술탄 무하마드 코다반데(Muhammad Khodabandeh)가 되는 울자이투가 새로 정착하기 시작한 때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울자이투는 1304년에 왕위에 오른 뒤 도시를 확장하여 수도로 삼고, 술타니야(제국)라고 이름 지었다. 타브리즈(Tabriz)와 함께 술타니야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주요 무역로가 되었다. 16, 17세기에 술타니야는 점차 쇠퇴해 갔고 마침내 폐허만 남았다.

1302년~1312년에 만들어진 울자이투의 영묘는 도시의 주요 기념물로, 비옥한 초원으로 둘러싸인 도시 거주지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팔각형 건물 위에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한 멋진 반구형 돔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이란의 이중 돔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돔에는 버트레스(buttress, 벽면을 안정시키기 위한 장치)도 없고 어떤 부가적인 장식도 없이 터키옥 파이앙스(faience, 유약으로 아름답게 착색한 도자기) 타일이 씌워져 있다. 장식 요소로 8개의 날렵한 첨탑이 둘레에 서 있다.

드럼(drum, 돔이나 쿠폴라를 지지하는 원형 또는 다각형의 벽) 둘레는 종유석 코니스(처마 돌림띠)의 담청색과 군청색 사이로 정사각형 쿠픽(Kufic, 아라비아 문자) 문양이 변이를 만들어내며 장식되어 있다. 2층 구조인 능묘의 회랑들은 인도의 타지마할처럼 건물들을 바라보며 밖으로 열려 있다. 구조적으로 이 건물은 걸작으로 평가된다. 내벽의 장식은 본래 엷은 황금색 톤의 벽돌과 쿠픽 안에서 거대한 비문을 형성한 암청색 파이앙스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1313년 때때로 얕은 부조로 작업한, 아주 다양하고 멋진 장식품들을 사용하여 회반죽으로 다시 장식했다. 장식의 두 번째 단계는 이 기념물을 시아 사당(Shi’a shrine)으로 사용하던 시절에 시행되었다. 외부 장식은 첫 번째 단계에 끝마쳤다. 오늘날 영묘 바로 옆 둘레에는 성 모양의 석조 테라스가 있다. 본래 성 주위에는 폭 30m의 해자(垓字)가 있었다. 오늘날 이것은 고고학적 유적지이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다른 기념물들과 유적지들에는 울자이투가 타브리즈의 뒤를 이어 수도로 건설한 술타니야의 올드 시티, 술탄 첼레비 오글루(Chelebi Oghlu)의 능묘, 팔각탑이 있는 1330년대의 벽돌 구조, 울자이투 궁정의 종교인이자 시인인 물라 하산 카시(Mullah Hassan Kashi)의 능묘, 타페 누르 쿠차크(Tappeh Nur Kuchak)로 알려진 이웃하는 터와 함께 있는 타페 누르 가잔(Ghazan)의 묘 등이 있다.

역사 속에는 술타니야 지역이 ‘알레잔의 초원(Prairie of the Alezans)’ 또는 ‘매 사냥터(Falcon’s Hunting Ground)’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의 토양은 빗물을 완전히 흡수하지 않아서 특별히 풍요로운 초원이 되었다. 특히 말에게 먹일 풀이 적당히 자라는 초원이 되었으며 이 또한 이 도시가 이 지역에 건설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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