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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 [Sacred Sites and Pilgrimage Routes in the Kii Mountain Range]

  • 제목 :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
  • 설명 : © UNESCO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

상세정보

  • 국가 일본(Japan)
  • 위치 미에(三重|||Mie)|||나라(奈良|||Nara)|||와카야마현(和歌山|||Wakayama Prefectures)
  • 좌표 N33 50 13|||E135 46 35
  • 등재연도 2004년
  • 등재기준

    기준 (ⅱ) : 기이 산지의 문화 경관을 이루는 기념물과 유적은 신도와 불교의 독특한 융합이며, 동아시아 종교 문화의 교류와 발전을 보여준다.

    기준 (ⅲ) : 기이 산지의 신도 신사와 불교 사원, 그리고 관련 의식은 지난 1,000여 년간 일본 종교 문화의 발전을 확연히 보여준다.

    기준 (ⅳ) : 기이 산지는 독특한 형태의 신사와 사찰을 만들어낸 배경이 되었으며, 이는 일본 곳곳의 사원과 신사 건물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기준 (ⅵ) : 유산과 주변의 산림 경관은 1,200 여 년 동안 영산(靈山)에 대한 지속적이면서도 잘 입증된 전통을 보여주는 곳이다.

요약
이 유적지는 태평양을 굽어보는 기이 산(紀伊山)의 울창한 숲 속에 있다. 요시노(吉野)와 오미네(大峯), 구마노 산잔(熊野三山), 고야산(高野山) 3곳의 영지(靈地)는 참배길을 통해 고대의 수도인 나라(奈良)와 교토(京都)와 연결된다. 일본의 전통적인 자연 숭배 의식에서 비롯된 신도(神道)와, 중국과 한국을 통해 유입된 불교의 독특한 융합인 신불습합(神佛習合) 사상의 성지이다. 495.3㏊에 달하는 3곳의 유산과 주변의 산림 경관은 1,200여 년 동안 영산(靈山)에 대한 지속적이면서도 잘 입증된 전통을 보여주는 곳이다. 시냇물, 강, 폭포로 가득한 이 지역은 여전히 일본 생활 문화의 한 부분으로, 매년 1,500만여 명이 참배나 트레킹을 위해 방문한다. 3곳의 유산에는 모두 사원이 있으며, 일부는 9세기에 건설되었다.
목차
역사적 배경

BC 3세기〜BC 2세기경에 도작(稻作) 문화가 일본에 전해지면서 저지대를 중심으로 정착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산, 폭포, 바위, 나무 등의 자연물을 신으로 숭배하는 신도(神道) 사상은 언덕에 있던 고대 주거지와 연관되면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고대인들은 산의 신은 평야 지대의 벼 재배에 필수적인 물과 도시의 발전에 필요한 금괴를 다스린다고 여겼다. 또한 그들은 첫 번째 수도인 나라(奈良)를 세운 초대 천황을 지도하는 신이 산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신도는 농촌 지역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과 한국에서의 사례와 같이, 6세기 중반에 도입된 불교는 중앙집권 체제의 정부에 의해 발전했다. 정부는 국가를 수호하는 종교로서 불교를 수용했고, 8세기 중반에 일본 각 지방에 사찰이 세워졌다. 같은 시기에 기이 산지와 연관을 가지는 정토(淨土) 관념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산에서 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8세기에 수도가 교토로 이전되었고, 9세기에는 금욕적인 불교 분파인 밀교(密教)가 중국에서 일본에 유입되었다. 밀교에서는 산이야말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장소라는 믿음을 강조했다. 이것이 진언종(真言宗)을 발전시켰고, 새로운 사찰들이 기이 산지에 많이 세워졌다. 밀교와 진언종의 발흥과 동시에, 토지에 기반을 둔 귀족들의 권력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이 새로운 종교에 쉽게 귀의했다. 이 새로운 종파도 8세기 이래로 존재했던 신도와 상호작용을 했으며,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일본 고유의 신불습합 신앙이 생겨났으며, 이는 19세기까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9〜10세기에 수도를 중심으로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늘어나면서 기이 산의 영지를 방문하는 참배객들도 증가했다. 이 때 참배길이 많이 정비되었다.

11〜12세기에 정부가 중국에 사절을 보내는 것을 중단하기로 결정하면서 일본식의 독특한 불교 수행과 이와 관련된 건축이 성행했다. 기이 산지 안에 있는 3곳의 영지에 대한 성역화가 진전되었고, 무사들 사이의 분쟁에서 초래된 사회적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하는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왕실, 귀족, 무사들이 사찰과 토지를 기부했는데, 이것은 내세에서의 더 나은 삶을 보장받기 위한 수단이었다. 11세기 말에 퇴위한 천황이 고야산과 구마노 산잔으로 처음으로 순례를 떠나면서 참배객 수가 더 많이 늘어났다. 이로 인해 여관이 발달하고 신사와 사찰이 개량되었으며 참배길을 따라 오지(Oji) 신사가 지어졌다. 또한 유적을 관리하기 위한 왕실과 귀족의 자금 지원이 장려되었다.

이리하여 12세기 말에 기이 산지의 영지는 주요 영산(靈山) 유적으로 조성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12세기 말 가마쿠라(鎌倉)에 새로운 무사정권이 세워졌지만, 왕실은 여전히 교토에 있었다.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왕실 파벌들 사이의 분쟁, 사무라이의 권력 장악, 봉건 영주들 사이의 전쟁 등으로 인해 천황과 중앙 권력은 약화되었다. 동시에 화폐경제가 성장하고 생산 기술이 개선되면서 부유층이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다. 금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참배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17세기부터 1868년까지 강력한 무사 정권이 지금의 도쿄인 에도(江戶)에 세워졌으며, 정부는 사찰과 관련된 토지들을 대부분 몰수했다. 하지만 정부와 백성의 사찰에 대한 지원은 계속되었다. 동시에 도로 여건이 개선되면서 여행이 더 쉬워졌고, 관광객들과 참배객들의 수도 증가했다.

1868년 무사 정권이 무너지고 왕정이 복고되었으며 수도가 도쿄로 이전되었다. 새 정부는 일본의 종교를 통제하는 조치들을 실행했고, 1868년 신도와 불교의 분리 칙령을 반포했다. 신불습합과 관련된 활동들을 금지했고, 신사에서 불상을 치웠다. 하지만 기이 산지와 이곳의 신사 단체들의 강력한 지원 덕분에 많은 불상들이 살아남았다. 칙령의 결과로 일본에서 문화유산의 유출이 심각해지자, 1897년 정부는 고대 신사와 사찰 보호법을 통과시켰다. 1929년에 이 법이 강화되었고, 1919년에는 자연 유산까지 확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가 회복되면서 사람들이 다시 기이 산지를 찾게 되었고, 이는 지금도 여전하다.

유산면적
495㏊
완충지역
1,137㏊
참고번호
1142
본문

기이 산지의 문화 경관을 이루고 있는 신도 신사와 불교 사찰은 신도와 불교의 독특한 융합 형태로서, 동아시아 종교 문화의 교류와 발전을 보여주는 예이다. 일본 전역의 불교 사찰과 신사 건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신사와 불교 사찰의 독특한 형태를 창조하는데 배경이 되었다.

유산을 이루고 있는 3곳의 영지는 태평양 쪽으로 튀어나온 반도에 있는 기이 산의 울창한 숲 속에 위치해 있다. 각각의 영지들은 복잡한 형태의 작은 길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북쪽으로 고대 수도인 나라와 교토와 연결된다. 이 지역은 6세기부터 1868년까지 번영했다. 기이 반도의 낭떠러지와 바위투성이의 산은 해발 1,000〜2,00m에 달하며, 산림이 울창하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혹독하면서도 평화로운 산악 지형으로 인해 이 지역은 고대부터 숭배를 받아 온 것 같다. 3곳의 영지는 11세기, 12세기에 많은 참배객을 끌어들이는 주요 영지가 되었다. 이 지역은 지금도 일본의 생활문화의 일부분이며, 많은 방문객들이 참배를 하거나 트레킹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참배 길은 모두 인접해 있지는 않고, 현대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이 있다. 산림으로 울창한 산이 이 유산의 의미를 뒷받침해 주며, 기이 산의 아름다움과 드라마, 그리고 남쪽의 바다와 대비되면서 만들어내는 경관 덕분에 이천 여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3곳의 사원에는 사찰, 신사, 동상, 사리탑 등의 건물과 문화재가 있고, 나무, 폭포, 바위 등의 자연물이 있다. 건축물은 대부분 나무로 되어 있고, 일본의 가옥과 비슷한 기둥과 지주 구조이다. 많은 건물들이 잇달아 재건되었다.

요시노(吉野)와 오미네(大峯) : 최북단에 있는 유적으로, 나라 근처에 있다. 요시노 혹은 유산의 북쪽 부분은 10세기 중반까지 일본에 가장 중요한 영산(靈山)으로 유명했으며, 그 명성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이곳은 7〜8세기에 신도(神道), 즉 산악숭배의 대상이었고, 8세기 말에 금욕주의 불교인 수험도(修驗道)의 최고의 성지가 되었다. 남쪽 부분인 오미네도 슈겐도와 관련이 있으며, 특히 혹독한 산악 지형과 연관된 금욕적 종교수행이 행해지던 곳이었다. 이곳에는 신도와 불교의 종교적 융합이 구현된 독특한 건축 양식의 건물들이 여럿 있다.

구마노 산잔(熊野三山) : 이 유산은 남쪽 끝에 있다. 이곳의 사원들은 비견할 데 없이 훌륭한 목조 건축 양식을 자랑한다. 이 유산 안에는 3곳의 신사와 2곳의 사찰이 있으며, 참배길로 서로 연결된다. 이들은 신도와, 신도·불교의 융합인 수험도(修驗道)의 영향을 보여주며, 남쪽 바다에 있다고 믿은 극락정토 사상과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

고야산(高野山) : 나라 남쪽 지역의 유산이다. 고도 800m의 산악 지대이며, 일부는 산기슭에 있다. 이곳은 땅의 신을 제사하는 연례 축제와 종교 의례, 불교 진언종(真言宗)의 제례의식이 행해지는 곳이다.

참배길 : 11〜12세기에 이곳의 영지가 조성되고 방문객이 늘어나자, 교토의 유적과 일본의 다른 지역을 연결해 주는 일련의 참배길이 만들어졌다. 몇몇 참배길은 원래의 길 위에 만들어졌다. 산 속의 참배길은 험하게 만들어졌는데, 종착지를 염두에 두기 보다는 길 위로의 여행 자체가 종교적 체험이 되었다. 대부분의 길은 너비가 1m이다. 몇몇 길에는 돌계단 혹은 석재 포장도로가 조성되었다. 숲을 관통하는 34㎞의 석재 포장도로는 구마노 산잔과 이세 신궁(伊勢神宮)을 연결하는 구마노 산케이미치(熊野参詣道)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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