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이동하기

우마우카 협곡 [Quebrada de Humahuaca]

  • 우마우카 협곡
  • 제목 : 우마우카 협곡
  • 설명 : © UNESCO / Author : Francesco Bandarin
우마우카 협곡

상세정보

  • 국가 아르헨티나(Argentina)
  • 위치 후후이 주(Province of Juyuy)
  • 좌표 S23 11 59.5|||W65 20 55.9
  • 등재연도 2003년
  • 등재기준

    기준 (ⅱ) : 우마우카 협곡은 과거 10,000년 이상 동안 안데스 고원 지대와 평야 지대의 사람들의 이동과 그들의 사상을 전파하는 주된 경로였다.

    기준 (ⅳ)(ⅴ) : 우마우카 협곡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정착, 농업, 교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본격적인 농경 사회인 스페인 정복 이전의 문명과 잉카 제국 성립 이전 문명의 독특함이 협곡 경관과 어우러져 극적이면서도 독보적인 경관을 자아내고 있다.

요약
‘카미노 잉카(Camino Inca)’ 문화의 주요 지역인 우마우카 협곡(Quebrada de Humahuaca)은 안데스 산의 춥고 높은 사막 고원 지대에서 시작되어, 남쪽으로 150㎞ 지점에 있는 리우 리오네(Rio Leone) 강으로 합쳐지는 리우 그란데(Rio Grande) 강의 웅장한 계곡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이 협곡에는 만여 년 동안 주요 교역로 역할을 했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선사시대 수렵 채집 공동체의 문화, 15~16세기 잉카 제국의 유산, 19~20세기 독립 전쟁시기의 전쟁 관련 흔적들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목차
역사적 배경

우마우카 협곡의 역사는 기원전 10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대의 수렵 채집 사회는 동굴에서 살거나 동굴을 임시 거주지로 이용했으며, 계절에 따라 이주를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제6천년기(6rd millennium BC, 기원전 6000~기원전 5001)에서 기원전 제3천년기(3rd millennium BC, 기원전 3000~기원전 2001)에 가뭄 등의 기상 악화로 인해 더 이상의 인구 이동은 없었으며, 기원전 2500년 이후 강수량이 증가하면서 새로운 이주민들이 도래하여 기존의 동굴 거주민들을 정복했다. 새로운 이주민들은 제한된 구역에서 수렵과 농경 생활을 하였다.

기원후 100년경부터 작은 마을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다른 지역과 연결해 주는 교통수단이 등장하게 되면서 라마를 이용한 마차들이 동쪽 삼림 지역의 흑요석, 터키옥석, 도자기 제품, 체빌(cebil)이라는 환각제 등을 수송하기 시작했다. 700년경 이후로 인구 증가와 농업 기술 발전으로 하류의 강 주변에 커다란 촌락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잉여 생산물이 증가하면서 주변 지역은 물론이고 먼 곳까지 교역을 한 것 같다. 이들 사회의 발전은 티티카카 호 주변에서 발원한 티와나쿠(Tiwanaku) 문명의 세력 확장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서로 교역을 했던 증거들을 찾아 볼 수 있다.

1000년 이후 티와나쿠 문명이 붕괴하고, 또 다른 사회적인 변혁의 시기를 거쳐서 협곡의 토착 문화가 마지막으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때에는 저지대의 촌락들은 포기하고, 고지대의 암석 지대에 마을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를 ‘푸카라스(요새, pucaras)’라고 하며, 인구증가에 대비한 밀집 주거지가 특징이다. 각각의 푸카라스는 협곡 내에 있는 여러 토착 민족들의 요새로 이용되었던 것 같다.

인구와 교역량이 증가하면서 협곡변의 광범위한 지역과 산맥 경사면을 중심으로 경작이 이루어졌다. 마차를 이용한 교통 체계도 질적 양적으로 성장하여 삼림 지대, 후후이 계곡, 남 볼리비아와 칠레 인접 지역까지 연결되게 되었다. 1430년~1480년 잉카 제국이 성장하면서 지역의 토착 사회는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다. 잉카제국의 전사들은 오랫동안 원해 왔던 교역로를 정복하고 통치했다. 잉카 인들은 광물 자원을 개발하고 대규모 농업 기업을 설립하여 이곳의 생산물들을 그들의 본거지로 수출했다.

수송과 통상(通商)의 편의를 위해 정착촌들을 새롭게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도로를 건설하고 도로망을 새롭게 정비했다. 이에 따라 우마우카 협곡은 잉카 제국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수송로와 연결되어 에콰도르에서 칠레, 아르헨티나까지 연결되었으며 그 길이는 약 8,000㎞에 이르렀다. 16세기가 되면서 스페인 인들이 몰려와 우마우카 협곡을 점차적으로 점령했다. 스페인도 잉카 제국과 마찬가지로 이 협곡의 교역로를 확보하여 자원을 획득하고자 했다. 기존의 도로망에 따라 은, 가축, 면제품을 수출하고 유럽산 물품들을 수입하는 교역이 증가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새로운 질병에 걸려 죽게 되고, 스페인 이민자들이 협곡 안에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하고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인구 변동이 크게 일어났다. 교역량이 증가했고, 18세기에는 협곡과 부에노스아이레스와 페루 고원 지대까지 연결되는 원거리의 주요 교역로를 따라 중간 기착지들이 세워졌다. 1810년도부터 14년 동안 중남미 국가들은 1816년의 아르헨티나 독립을 비롯하여, 독립 전쟁과 잇따른 내전, 신생국들의 국경 전쟁 등 정치적 사회적으로 격변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변혁기 동안 우마우카 협곡은 병력과 무기의 주요 이동로로 이용되었다.

19세기 정치적으로 안정되면서 무역은 증가했고, 특히 안데스 산맥과 인근의 사막 지역에서 칠레 초석(硝石) 광산이 문을 열자 교역은 더욱 활발해졌다. 1900년도 협곡에 철도가 이어지면서 무역의 방식도 새롭게 바뀌게 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 협곡의 주요 도로는 팬아메리칸 도로의 일부가 되었으며, 우마우카 협곡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유산면적
172,116㏊
완충지역
369,649㏊
참고번호
1116
본문

우마우카 협곡에는 정착민들이 개척하고 이용한 과거 정착촌들의 흔적이 협곡을 따라 폭넓게 흩어져 있다. 선사 시대의 수렵 문화와 초기 농업 공동체(기원전 900~기원전 400), 조직화된 대규모 농경 사회(400~900), 히스패닉 시대 이전(pre-Hispanic)의 번성했던 마을과 도시들(900~1430/80), 잉카 제국(1430/80~1535), 스페인 양식의 마을과 도시와 교회들(153/93~1810), 독립 전쟁 시절(1810~20세기)의 유산들이 남아 있다.

약 1500년경에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는 코크타카(Coctaca)에 있는 계단식 밭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금도 여전히 이용되고 있는 이 밭은 푸카라스(pucaras)라고 알려진 일련의 요새 도시들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 계단식 밭들과 푸카라스가 만들어 내는 경관은 아주 독특하고 인상적이며, 남미에서도 으뜸가는 장관 중의 하나이다. 또한 협곡에는 교회와 성당을 비롯하여 이 지역의 전통 건축물이 다수 있다.

우마우카 협곡은 리우그란데 강의 침식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길고 좁다란 계곡이다. 협곡 양쪽으로 높은 산맥들이 즐비해 있으며, 춥고 건조한 안데스 사막 고원 지대서부터 동남쪽으로 넓고 따뜻하며 습한 후후이(Jujuy) 계곡까지 뻗어 있다. 이 협곡은 수렵 사회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주요 교역로였으며 인간의 사상 교류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통로이다. 곳곳에 있는 작은 지류들은 삼림 지대와 본류를 연결해 주었으며, 고원 지대의 자원들을 평야 지대로 수송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작은 지류들의 네트워크가 우마우카 협곡의 가장 중요한 점이라 할 수 있다.

협곡에 흩어져 있는 26개의 암벽 예술 유적지들은 고대의 수렵 채집 시대부터 스페인 식민지 시대 이전까지 이곳의 정착민들이 동굴을 이용하고 거주지로 사용했던 증거이다. 몇몇 동굴에서는 선사 시대의 암면 조각, 기하학적인 상형 문자, 동물 문양, 사람과 동물들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으며, 맨발의 무사들과 맞서는 스페인 정복자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우마우카 협곡은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정착, 농업, 교역이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선 히스패닉 시대와 잉카 제국 이전의 사회 공동체들은 계곡을 따라 자신들의 거주지를 계획적으로 건설하는 고도의 영토 전략을 세웠으며, 한편으로 뛰어난 관개 기술을 이용하여 집약적인 농업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관련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