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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 옛 시가지 [Old City of Dubrovnik]

  • 제목 : 두브로브니크 옛 시가지
  • 설명 : © UNESCO / Author : Francesco Bandarin
두브로브니크 옛 시가지

상세정보

  • 국가 크로아티아(Croatia)
  • 위치 아드리아 해(Adriatic Coast)|||두브로브니크-네레트바(Dubrovnik-Neretva) 주
  • 좌표 N42 39 2.016|||E18 5 29.004
  • 등재연도 1979년(1994년 확장)
  • 등재기준

    기준 (vi) : 두브로브니크의 역사적인 도시와 건축 단지는 오늘날까지 요새화한 도시로서 중세 구조의 주요 부분, 즉 성곽, 거리와 광장 배치도, 인상적인 공공건물과 일반 건물, 종교 건물, 그리고 개인 주택을 보존하고 있다. 건물들의 독특한 예술적 가치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도시적 · 문화적 · 역사적 메시지를 담고 있기에, 두브로브니크는 유고슬라비아 영토 안에서 뛰어난 가치를 지닌 자산으로 인정된다.

    이 도시가 발전하는 몇 세기 동안 도시 구조는 특히 13세기에 행해진 광범위한 도시 개발로 인해 통일성이 잘 보존되고 있다. 도시의 ‘지위’에 관한 보존 문서를 현재 상태와 비교하면 도시 설계자들의 아이디어가 적용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 도시의 도시 계획은 넓은 지역을 기념비적인 중심지로 조성하려는 도시 설계자들의 신념을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이는 공화국 설립에 있어 독특한 점이었다. 이러한 신념을 유지하여 19세기 초까지 몇몇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자유를 유지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는 도시에서 개인 주택을 건설할 때 의도적으로 눈에 띄는 양식으로 건설하려고 했으며, 이러한 개성은 독특한 건축물과 건축물의 품질을 설명해 주는 중요 이유이다. 전체 단지를 둘러싸고 잘 보존된 요새화된 성벽과 13세기~17세기의 축성술로 대표되는 거대한 방어 시설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있다. 도시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실용적인’ 건축물의 거대한 양식과 석재에 표현된 ‘심미적인’ 특징은 기능적 디자인과 심미성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후자의 예는 민세타 요새의 북서쪽 코너에 있는 거대한 탑에서 보이는데, 이는 15세기의 거장 미켈로치(M. Michelozzi)와 게오르기우스 달마티쿠스(Georgius Dalmaticus)가 건축했다. 이런 모든 요소를 고려하면 두브로브니크의 역사적 도시 단지는 중세 건축물과 도시계획 면에서 매우 독창적이었으며, 이 도시 단지는 소규모 지역뿐만 아드리아 해, 발칸 지역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요약
달마티안(Dalmatian) 해변에 있는 ‘아드리아 해의 진주(Pearl of the Adriatic)’는 13세기 이후 지중해의 요충지였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는 1667년의 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고딕 양식 건축물,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 교회, 수도원, 궁전과 분수가 보존되어 있다. 1990년대에 무력 분쟁 때문에 또다시 피해를 입었지만, 유네스코의 중요 복원 프로그램으로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목차
역사적 배경

옛 도시의 서쪽으로 확장하려던 제안에는 브라살리예(Brsalje) 고원과 필레 교외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두브로브니크 이전에 있던 로만 타운(Roman town)으로 가는 간선도로 지점이었으며, 고고학적인 발굴로 초기 그리스도교 바실리카, 그리고 중세 묘지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절벽에 있는 로브리예나체(Lovrijenac) 요새는 1301년 문서에 처음 등장하는데, 방어적 중요성에 비춰 보면 훨씬 이전에 축조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몇몇 학자는 11세기 초에 축조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요새는 15, 16세기에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 필레 교외는 15세기의 계획 · 개발에 따랐으며,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명확하게 구분된 공업지역 주변에 세워졌다. 이곳은 무두질과 가죽제품 생산, 대포 주조, 비누 생산 등을 주로 했으며, 위생과 안전을 위해 성벽 바깥에 있었지만 요새의 보호 아래에 있었다. 15세기 초에는 중요한 염색 산업이 발전했으며, 유리 제조술 · 종 주조 · 직물산업 등의 다른 산업이 뒤를 이었다.

이 정착지에는 산업 활동에 따라 노동자 주택을 건축했으며, 14세기에는 성 조지 교회가 건축되었다. 그러다 15세기에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필레 교외는 필레와 그루즈(Gruz)를 연결하는데, 이 중세 도시의 성곽 외부를 지나가는 새 도로가 19세기에 건설되어 변화가 있긴 했지만 여전히 원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성곽 북쪽은 도시 배후(Iza Grada) 지역으로, 도시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공지(空地)로 남겨져 있었다. 필레와 그루즈를 잇는 도로는 이 도시의 북쪽 경계선을 이룬다.

옛 도시의 동쪽은 플로체(Ploce)이다. 이곳은 몇 세기 동안 내륙지역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세계 문화유산 경계 확장을 신청한 지역은 간선도로의 남쪽인데, 여기에는 검역소와 레블린(Revelin) 요새가 있다. 방파제는 1485년 르네상스기에 가장 유명한 라구사 공화국의 기술자 파스코예 밀리체비츠(Paskoje Milicevic)의 계획에 따라 건설되었다. 방파제를 건설한 목적은 남동쪽에서 불어오는 돌풍으로부터 항구를 보호하고, 도시로 다가오는 선박의 통제 시설을 개선하려 한 것이다.

검역소는 1627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648년에 완공했다. 교역상과 여행객들이 이 문을 통과해 중부 유럽과 동방의 전염병이 들끓는 지역에서 두브로브니크로 들어왔기 때문에, 검역소는 도시의 동쪽 성문 부근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 검역소는 놀라울 정도로 원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북쪽 도시의 해자를 통제하려고 1449년에 축조한 레블린 요새는 16세기에 건축가 안토니오 페라몰리노 디 베르가모(Antonio Ferramolino di Bergamo)가 리모델링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건설했다.

로쿠룸 섬은 해변에서 500m 떨어진 두브로브니크의 남동쪽에 있다. 1023년에 이 섬은 두브로브니크에 있던 여러 공화국 가운데 최초로 베네딕트회 수도원이 되었다. 수도원 단지, 특히 1667년 지진 참사 때 파괴되어 재건되지 않은 동정녀 마리아 교회는 그 뒤 몇 세기 동안 확장되었다. 15세기 후반에 파도바의 성 유스티나회 신도들에게 넘어가면서 베네딕트회 수도원의 폐허가 있던 남쪽에 고딕-르네상스 양식으로 새로운 수도원이 건설되었다.

유산면적
97㏊
완충지역
54㏊
참고번호
95bis
본문

두브로브니크는 7세기 전반에 에피다우름(Epidaurum) 피난민들이 섬에 정착해 ‘라우스(Laus)’라고 명명하면서 건설되었다. 15세기까지 불리던 이름 라구사(Ragusa, Rausa)는 라틴어로 암석을 의미하는 ‘Lausa’에서 왔다. 그 반대쪽의 스르지(Srđ) 산 아래에는 크로아티아어로 떡갈나무를 뜻하는 ‘두브라야(dubrava)’에서 기원한 ‘두브로브니크’라는 정착지가 있다.

이 정착지는 슬라브족이 일구었는데, 12세기경 섬과 해안 간의 해협이 메워지면서 정착지가 통합되었고 이때부터 비잔틴 제국의 보호를 받았다.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베니스의 통치(1205~1358) 아래 있었으며, 1358년에 자다르(Zadar) 평화협정에 따라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으로 합병되었다가 15, 16세기에 절정에 이른 실질적인 공화제 자유국가였다. 그 후 지중해 해운업의 위기와 공공건물을 대부분 붕괴시킨 1667년 4월의 지진 참사 때문에 공화국의 행복은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이 엄청난 지진은 도시 발전의 전환점이 되었다.

두브로브니크는 균형 잡힌 거리 배치를 지닌 중세 후기의 성곽도시로, 놀랄 만큼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웅장한 요새와 기념비적인 성문에 있는 뛰어난 중세 양식,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 중에는 11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청(지금의 렉터스(Rector’s) 궁)이 있으며, 14세기에 지어졌으나 외관은 거의 바로크 양식인 프란체스코 수도원, 1667년의 지진 이후 재건축된 대규모의 도미니크 수도원 대성당,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예술가의 손을 거친 작품임을 증명하며 절충적인 외관을 지닌 관세청(Sponza), 그리고 도시의 수호성인 성 블라이세(Blaise) 성당 같은 바로크 양식 교회 등이 있다.

원래 세계유산은 방어벽과 도시 내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 15세기에 계획, 개발한 필레(Pile)의 중세 교외 공업단지와 11세기 초부터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15, 16세기 형태를 지닌 절벽의 로브리예나츠(Lovrijenac) 요새를 포함시켰다. 여기에 17세기 초에 지어져 외국에서 들어오는 전염병 보균자들을 수용했던 검역소와 남동 돌풍으로부터 항구를 보호하려고 15세기 말에 조성한 방파제, 북쪽에 있는 해자를 통제하려고 1449년에 지은 레벨린(Revelin) 요새도 추가했다.

로쿠룸(Lokrum) 섬은 해변에서 500m 떨어진 두브로브니크 남동쪽에 있다. 이 섬은 1023년에 베네딕트회 수도원이 되었는데, 이는 두브로브니크의 여러 공화국 가운데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후 몇 세기 동안 계속 확장되었으며, 15세기 후반에 파도바(Padua)에 있는 성 유스티나회 신도들에게 넘어가면서 베네딕트회의 잔해가 있던 남쪽에 고딕-르네상스 양식으로 새로운 수도원을 세웠다. 19세기 초의 점령 기간에 프랑스인이 왕립 요새 항구를 건설하기 시작해 1830년에 오스트리아인이 완공했다. 1859년에는 훗날 멕시코의 황제가 된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Maximilian) 대공이 베네딕트회 수도원의 폐허가 있던 곳에 고전주의 양식의 저택을 지으려고 이 섬을 샀는데, 공사는 일부만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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