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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에도와 아스투리아스 왕국 기념물군 [Monuments of Oviedo and the Kingdom of the Asturias]

  • 제목 : 오비에도와 아스투리아스 왕국 기념물군
  • 설명 : © UNESCO / Author : Yvon Fruneau
오비에도와 아스투리아스 왕국 기념물군

상세정보

  • 국가 스페인(Spain)
  • 위치 아스투리아스 자치지방(Autonomous Community of Asturias)|||아스투리아스 주(Province of Asturias)
  • 좌표 N43 21 45.432|||W5 50 34.908
  • 등재연도 1985년(1998년 확장)
  • 등재기준

    기준 (ⅰ) : 프레-로마네스크 양식의 아스투리아스 건축은 초기 기독교 예술을 변형한 것이 아니고 카롤링거 왕조 시대 예술의 특징을 따라한 것도 아니어서 아주 독특한 예술적 성취라고 할 수 있다. 바실리카 양식의 배치를 보이면서도 전체가 둥그런 모양의 천장인데다, 각주가 아닌 원주를 사용한 이 성당들은 서고트족을 연상시키는 풍부한 장식과 아랍적 요소, 그리고 소아시아 지방의 거대한 신전을 연상시키는 형태이다.

    기준 (ⅱ) : 아스투리아스 기념물군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중세 건축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기준 (ⅳ) : 오비에도 주변의 왕궁과 성당들은 코르도바 지역에서 이슬람 세력이 융성하던 시기에도 살아남은 작은 기독교 왕국 아스투리아의 문명을 보여 준다.

요약
9세기 이베리아 반도(Iberian peninsula)의 작은 왕국 아스투리아스(Asturias)에는 기독교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살아 있었다. 이곳에서 이베리아 반도의 종교 건축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프레-로마네스크(pre-Romanesque) 건축 양식이 탄생했다. 고대 수도였던 오비에도(Oviedo) 시내와 인근의 산타 마리아 델 나란코(Santa María del Naranco) 성당, 산 미겔 데 리요(San Miguel de Lillo) 성당, 산타 크리스티나 데 레나(Santa Cristina de Lena) 성당, 카마라 산타(Cámara Santa)와 산 훌리안 데 로스 프라도스(San Julián de los Prados) 성당 등이 프레-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최고 걸작이다. 이와 더불어 라 폰칼라다(La Foncalada)로 알려진 우물은 당대의 놀라운 수리공학(水理工學) 구조물로 알려져 있다.
목차
역사적 배경

아스투리아스 국왕 프루엘라 1세(Fruela I, 757~768 재위)가 오베타오(Ovetao)라고 알려진 곳에 구세주 봉헌 바실리카 성당을 지었다. 이 성당은 왕실의 주거지를 겸했으며, 그의 아들 알폰소 2세(Alfonso II)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거의 같은 시기, 같은 곳에 수도회가 만들어져 산 비센테(San Vicente) 봉헌 수도원을 건축했다.

이 새로운 정착지는 794년~795년에 코르도바의 아랍 제후국이 벌인 전쟁 때 파괴되었지만, 알폰소 2세가 재건하여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알폰소 2세의 긴 재위 기간(791~842) 동안 오비에도에 많은 교회 건물과 세속 건물이 들어섰는데, 성벽 안에 있는 것으로는 재건된 바실리카 성당과 수도원, 제2 바실리카 성당인 산 티르소(San Tirso) 봉헌 성당, 성처녀 봉헌 성당, 왕궁, 목욕탕이 있고, 성벽 밖에는 산 훌리안(San Julián)과 산타 바실리사(Santa Basilisa) 봉헌 제3 바실리카 성당이 있다.

나란코 산 남쪽의 2개의 종교 건축물인 산타 마리아 델 나란코와 산 미겔 데 리요는 라미레 1세의 가혹한 통치기(842~850)에 세워졌다. 그가 왜 선(先)대왕들의 수도에서 몇 마일이나 떨어진 이곳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스투리아스 최후의 왕이며 가장 위대한 왕인 알폰소 3세(866~910)의 업적은 성벽 밖 북동쪽에 요새를 건축한 것이다.

이 성 아래에는 그 지역에서 소카스티에요(Socastiello)로 알려진 구역이 있는데, 이곳은 중세 말엽에 유대인들의 거주지였다. 코르도바의 순교자 에우로히우스(Eulogius)와 레오크리시아(Leocricia)의 유물을 오비에도로 가져온 것이 이 무렵이었다. 이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성당에 카마라 산타(Cámara Santa, 거룩한 방이라는 뜻)라는 유물 보관소가 만들어졌고, 중세 말기에는 순례지가 되었다.

알폰소 왕이 죽은 후 왕궁이 레온으로 옮겨지고 왕실과 관계가 단절되면서 오비에도는 쇠퇴해 갔다. 그러나 오비에도는 종교적이고 교회 내적인 사안들에 대해서는 순례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와 맞먹을 정도로 영향력 있는 지위를 계속 유지했다. 또한 오비에도는 카스티야인과 프랑크인을 위한 2개의 독립된 관할 구역을 설정할 정도로 수많은 프랑크 이민자들을 끌어들였다. 남서 프랑스 사이의 이런 연결은 중세 시대 내내 지속되었다.

레온과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 통치기(1065~1105)에 오비에도에 푸에로 헌장(Fuero Charter)이라 불리는 최초의 법령이 선포되었다. 이 법령으로 국왕이 아닌 오비에도 주교에게 충성을 바친 사람들을 남김없이 쫒아냈다. 알폰소 9세(1188~1230 재위)는 이 도시의 확장된 도시 공간에 새로 요새를 지을 권리를 부여했다. 도시는 곧 이 범위를 넘어 확장해 갔고, 외곽에 탁발 수도승들의 단체가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종교 기반 시설들(특히 산 펠라요(San Pelayo) 성당과 수도원, 산타 마리아 성당과 수도원)의 영향력이 매우 커져 도시 지역의 많은 부분이 이 시설들의 소유가 되었다.

이러한 중세적 질서는 1521년의 크리스마스에 발생한 끔찍한 화재로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 후 복구 사업 때는 주민들이 교회의 지배에서 벗어나 상당한 자유를 얻게 되었다. 시청과 법원(아우디엔시아(Audiencia)), 대학교와 같은 공공건물들이 세워졌고, 17세기와 18세기에는 부르주아들의 훌륭한 대저택과 주택이 많이 건축되었다.

참고번호
312bis
본문

오비에도 주변의 왕궁과 성당들은 코르도바(Cordoba) 지역에서 이슬람 세력이 융성하던 시기에도 살아남은 작은 기독교 왕국 아스투리아의 문명을 보여 준다. 프레-로마네스크 양식의 아스투리아스 건축은 초기 기독교 예술의 변형도 아니고 카롤링거(Carolingian) 왕조 시대 예술의 특징도 없어서 아주 독특한 예술적 성취라고 할 수 있다. 바실리카 양식의 배치를 보이면서도 전체가 둥그런 모양의 천장인데다, 각주(角柱)가 아닌 원주(圓柱)를 사용한 이 성당들은 서고트족(Visigoth)을 연상시키는 풍부한 장식과 아랍적 요소, 그리고 소아시아(Asia Minor) 지방의 거대한 신전을 연상시키는 형태이다. 아스투리아스 기념물군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중세 건축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아랍이 스페인을 정복한 직후에 펠라요(Pelayo)가 세운 작은 기독교 왕국 아스투리아스가 산악 지대에 재건된 것은 그 정치적 의미를 가릴 만큼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하다. 서고트 왕국에서 갈라져 나온 이 공국의 생존은 오랫동안 위태로웠지만, 일종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가톨릭 국왕들이 그라나다(Granada)를 탈환함으로써 이슬람과 800년 동안 지속해 온 전쟁을 끝낸 코바돈가(Covadonga) 전쟁(718)이 첫 번째 승리였다는 말에는 편견이 담긴 셈이다.

아랍의 공격으로 빈번하게 위협을 받긴 했지만(오비에도는 789년에 함락당하고 794년에 재약탈을 당했음),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9세기에 기독교의 최후 거점이었다. 나아가 이곳에서는 특별한 종류의 건축 양식이 시작되어 라미레 1세(Ramiré I)의 통치기(842~850)에 최고 정점에 다다랐다. 라미레 1세는 유산에 대한 원천적 사료인 『알벨다(Albelda), 세바스티안(Sebastian), 실로스(Silos) 연대기』에서 위대한 건축가로 묘사된 인물이다.

나란코 산의 비탈에 있는 왕국의 수도 오비에도 바로 앞의 산타 마리아 델 나란코(Santa María del Naranco)와 산 미겔 데 리요는 둘 다 라미레 1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세 번째 건축물은 좀 더 최근의 것으로, 라미레 1세 통치기의 공간적 · 구조적 · 장식적인 혁신이 적용되었다. 이 건축물은 산타 크리스티나 데 레나(Santa Cristina de Lena)인데, 오비에도 남쪽 37㎞ 지점의 레온(Leon)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있다.

산타 마리아 델 나란코는 원래 2층으로 된 왕궁이었다. 1930년~1934년에 실시된 발굴 작업 결과, 아래층에 있는 방 하나는 목욕탕이었음이 밝혀졌다. 905년과 1065년에 성당으로 바뀐 직사각형의 라미레 왕궁은 북쪽 끝에 외부 계단이, 남쪽 끝에 발코니가 있다. 이 발코니는 로지아(loggia)를 통해 동쪽과 서쪽이 개방되어 있는데, 로지아는 만(灣) 위에 있어 전망대 역할을 하며 삼면이 모두 트여 있다. 건축 당시에 예배당이 하나 있었던 산 미겔 데 리요는 나란코 궁과 매우 흡사하게 생긴 거대한 건물이었으나, 건축 당시의 것으로는 경탄할 정도로 균형이 잘 잡힌 2개의 베이(bay, 기둥 사이의 구획)만 지금 남아 있다.

앞에 소개된 탁월하게 창조적인 두 건물의 축소형인 산타 크리스티나 데 레나(Santa Cristina de Lena)는 빼어난 아스투리아스 건축의 마지막 시기(850~866경)를 구현한 것이다. 추정이 맞는다면, 이 건물은 오르도뇨 1세(Ordoño I)의 왕지에 있던 예배당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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