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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 [Masada]

  • 마사다
  • 제목 : 마사다
  • 설명 : © UNESCO / Author : Leila Maziz
마사다

상세정보

  • 국가 이스라엘(Israel)
  • 위치
  • 좌표 N31 18 48.6|||E35 21 9.9
  • 등재연도 2001년
  • 등재기준

    기준 (ⅲ) : 마사다는 고대 유대 왕국의 상징으로, 1세기 말에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그 뒤 이스라엘 사람들은 디아스포라의 길을 걸었다.

    기준 (ⅳ) : 마사다의 헤롯 왕 궁전은 초기 로마 제국의 사치스러운 별궁의 대표적인 예이다. 반면 기념물을 둘러싼 병영과 다른 요새들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가장 세련되고 완전한 로마 궁성 보루이다.

    기준 (ⅵ) : 마사다 요새와 궁전을 점거한 유대 저항군이 최후를 맞은 비극적 사건은 유대인의 문화적 정체성과 더 보편적으로는 압제와 자유 사이에서 인간이 벌인 끊임없는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요약
마사다(Masada)는 황야를 배경으로 사해(死海, Dead Sea)를 굽어보는 바위투성이 구릉에 자리한 천혜의 요새이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이 유적은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상징이었다. 73년 로마군의 공격에 맞선 유대 저항군은 이곳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이다 최후를 맞았다. 유대의 헤롯 왕(Herod, 기원전 37년〜기원후 4년 재위) 때 초기 로마 제국의 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설한 왕궁 터가 남아 있다. 왕궁을 둘러싼 병영과 요새, 공격 램프(ramp, 건축물로 진입하기 위해 만든 경사로)는 로마 제국의 공성 보루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가장 완전한 유적이다.
목차
탁월한 보편적 가치

마사다는 사해를 굽어보는 아름다운 자연에 극적인 형태로 위치한 천혜의 요새로, 유대 왕 헤롯은 그 위에 로마의 고전주의 양식으로 호화로운 왕궁을 건설하였다. 유대가 로마의 속주가 된 뒤 마사다는 생존한 유대 저항군의 마지막 피난처였다. 이들은 로마군이 마지막 방어선을 뚫고 진격해 들어왔을 때 노예가 되기보다는 자살을 택했다. 그로써 마사다는 유대인에게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곳이 되었다. 마사다는 또한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궁전의 터는 이런 종류의 건축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로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공성 보루들은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로마 제국의 유적이다.

유대 헤롯 왕이 건설한 마사다 유적 가운데 특히 테라스가 3개 있는 궁전은 극한 조건에서도 화려한 디자인으로 정교하게 설계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구릉 북쪽 면에 인상 깊게 자리한 궁전은 로마 제국 고전주의 양식의 뛰어난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 시설은 특히 정교해서 단 하루 동안 내린 빗물을 모으면 2〜3년 동안 1,000명에게 식수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성취 덕분에 황폐하고 고립되고 메마른 구릉지를 풍요로운 궁전 휴식처로 바꿀 수 있었다.

거대한 성벽으로 더욱 튼튼하게 요새화된 이 천혜의 방어 유적은 로마 제국 통치에 반대한 유대 저항군이 차지했으나 마침내 막강한 로마군의 포위 공격을 받기에 이른다. 유적을 둘러싼 병영, 공성 보루, 공격 램프와 사변형으로 된 고대 로마 군단의 요새망은 로마 제국의 유적으로는 가장 완전하다. 마사다는 압제와 자유 사이에서 인간이 벌인 끊임없는 투쟁의 통렬한 상징이다.

완전성

6세기에 비잔틴 수도원이 와해된 뒤 유대 황야 남쪽 끝의 거친 기후에 민가에서 멀리 떨어졌던 까닭에 마사다 유적은 13세기 넘게 방치되다가 1828년에야 발견되었다. 유산은 천혜의 요새와 주위의 공성 보루의 유적 터를 포함한다. 이 지역의 장엄하고 넓은 경관을 배경으로 마사다 유적은 몇 천 년 넘게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유일한 인공물은 더 아래쪽에 있는 관광객 센터와 케이블카뿐으로, 꼭대기에 역을 설치한 것은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시각적 영향을 최소화하도록 새로운 형태로 설계하고 자리도 주위와 어울릴 만한 곳으로 옮겼다.

진정성

6세기에 비잔틴 수도원이 와해된 뒤 유대 황야 남쪽 끝의 거친 기후에 민가에서 멀리 떨어졌던 까닭에 마사다 유적은 13세기 넘게 방치되다가 1828년에야 발견되었다. 유산은 천혜의 요새와 주위의 공성 보루의 유적 터를 포함한다. 이 지역의 장엄하고 넓은 경관을 배경으로 마사다 유적은 몇 천 년 넘게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유일한 인공물은 더 아래쪽에 있는 관광객 센터와 케이블카뿐으로, 꼭대기에 역을 설치한 것은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시각적 영향을 최소화하도록 새로운 형태로 설계하고 자리도 주위와 어울릴 만한 곳으로 옮겼다.

역사적 배경

마사다의 역사는 주로 1세기 유대 역사가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의 작품에 나온 것과 1963년〜1965년 발굴 때 나온 것이 유명하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마사다 유적은 제사장 요나단(High Priest Jonathan)이 최초로 요새화하였다. 기원전 2세기에 요나단이라는 이름의 제사장이 둘 있었는데, 그중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지금까지 마사다 발굴 작업에서 발견된 하스몬가(Hasmonaean) 시대(기원전 103〜기원전 40)의 유일한 유물은 알렉산더 야네우스(Alexander Jannaeus)의 수많은 주화이다. 그리고 한 동굴에서 금속병용시대(기원전 4000년)와 그 뒤 초기 철기 시대(기원전 10〜기원전 7세기)에 이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발견이 있었다.

헤롯 왕은 사실상 난공불락이던 마사다를 골라 자신과 가족의 피난처로 삼았다. 내적으로는 유대 왕국에 대한 유대인의 위협, 외적으로는 유대 왕국을 이집트 왕국에 복속시키려는 클레오파트라의 위협에 대한 대비였다. 처음에 건물들은 로마의 고전주의 건축 양식을 따르긴 했으나 이후에 건축한 것들보다 상대적으로 수수한 편이었다. 그 뒤 건물을 점점 확장하고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왕궁이 사치스러워졌다. 헤롯 왕은 재위 말기에 다시 위협을 느껴 요새를 재건하고 강화하였다.

서부 궁전의 핵심부는 초기 단계, 기원전 약 35년에 건설하였다. 여기에는 작은 궁전 3개, 행정 건물, 병영, 비둘기장(망루로도 사용함) 3개, 커다란 수조 몇 개, 수영장 등이 있다. 이런 건물은 전체적인 계획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산꼭대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건축가들은 전에 하스몬가 궁정을 위해 일했는데, 초기의 건물은 예리코(Jericho)의 건물과 놀랄 만큼 비슷하다. 주요 단계는 기원전 1세기의 2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은 거대한 북부 궁전이다. 북부 궁전은 왕과 왕족, 손님을 위한 공간이며, 옆에 커다란 목욕 시설이 있었다. 궁전 옆에는 기다란 창고 18개로 이루어진 거대한 창고 시설이 들어섰다. 이 건물군은 행정 건물과 함께 정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며 방어용 성채 또는 요새 역할을 하였다.

서부 궁전은 이 시기에 상당 부분이 확장되었다. 매우 큰 일련의 수조들을 새로 파고 접근로도 여러 곳에 만들었다. 초기 단계와 달리 이 시기에 작업은 단일한 계획 아래 일관되게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새 시설은 두 단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북부 궁전 주위이고 다른 하나는 서부 궁전 주위이다. 건축 양식 또한 순전히 로마 제국의 형식과 전통을 따랐다는 점에서 다르다. 기원전 15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마지막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새로운 건축물은 포대가 있는 성벽이다. 이 성벽은 길이가 1,290m로, 산꼭대기를 둘러싸고 있다. 이때 북쪽 단지의 몇몇 건물을 소규모로 개축하고 증축하였다.

기원전 6년 헤롯 왕 치세 말기에 유대 왕국은 로마 제국의 직할령이 되었다. 소규모 로마 수비대가 마사다에 설치되었다. 그러자 66년 유대인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유대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메나헴(Menahem)이 이끄는 열심당원은 마사다의 수비대를 기습하여 살육하였다. 그들은 반란 기간에 마사다를 수중에 넣었다. 70년 로마 황제 티투스(Titus)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사원을 파괴한 뒤 많은 유대인이 마사다에 들어와 기거하였다. 유대인은 헤롯 왕의 궁전 건물 일부를 점거하고 유대 교회와 의식용 수조, 작은 주택 등 더 수수한 구조물을 만들었다.

2년 뒤 로마 제국의 총독 플라비우스 실바(Flavius Silva)는 마지막 남은 이 유대 저항군의 본거지를 소탕하기로 결정하였다. 플라비우스 총독은 10군단과 많은 외인부대, 전쟁 포로를 투입하였다.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Eleazar Ben Yair)가 이끄는 유대인은 로마군과 전쟁 포로들이 구릉 아래쪽에 진지와 긴 포위 벽(성벽)을 쌓자 포위 공격에 대비하였다. 로마군은 마사다 서쪽 접근로 근처에 있는 바위 지대에 돌과 흙을 다져 굳힌 거대한 램프를 만들었다.

그리고 성벽 파괴용 대포가 있는 거대한 포위 탑을 만들어 램프로 끌고 갔다. 마침내 73년 로마 군사들은 요새 성벽을 뚫고 마사다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열심당원들은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로마군의 지속적인 공격에 오래 저항할 희망은 없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벤 야이르는 살아남은 남녀 960명과 아이들에게 “영광스러운 죽음이 불명예보다 더 바람직하다”라고 했다고 한다. 73년 5월 2일, 2명을 제외한 유대인 전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로마 제국은 또다시 마사다에 수비대를 설치하여 40여 년 동안 머물렀다. 수비대는 산꼭대기는 물론 플라비우스 실바 총독이 건설했던 요새를 모두 점령하였다. 로마 제국의 수비대가 철수한 뒤 유적은 5세기까지 버려졌다. 그 뒤 강력한 지진이 일어나 그때까지 남아 있던 헤롯 왕 시절의 건물 대부분이 무너지고, 언젠가부터 작은 기독교 수사 공동체가 산꼭대기에서 기거하였다. 그들은 수수한 예배당을 세우고 빈터와 동굴에 원시적인 주거지를 마련하였다. 수십 년 뒤 이 공동체도 흩어지고 마사다는 잊혀졌다. 그로부터 13세기가 지난 1960년대에 발굴 작업이 시작되면서 마사다는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존 및 관리 체계

유대 황야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황량한 곳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의 도시 개발 또는 농촌 개발의 압력이 애당초 차단된 거친 환경이다. 유산지역과 완충지역은 이스라엘 국유지이며, 고고학 유적은 1978년의 유물관련법에 따라 보호하고 있다. 1966년 이후 전체 마사다 유적과 그 주변 지역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98년 국립공원, 자연 보호 지역, 국립 유적지, 기념 유적지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갱신되었다. 마사다 국립공원은 1998년 법률에 따라 설정된 유대 황야 자연 보호 지역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더 강력하게 보호받게 되었다.

유산은 이스라엘 자연 및 공원 당국과 이스라엘 유물 당국의 공동 관리를 받고 있다. 현 관리 계획의 중요한 점은 ‘현 세대에서는 주요 유적에 대한 조사 발굴을 더는 할 수 없다’는 결정이다. 하지만 제한된 발굴 작업은 보전과 유지, 복원 사업상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 허용될 것이다. 꼭대기에서는 전체를 거의 조망할 수 없기 때문에 2000년에 마사다 동쪽 면 아래쪽 평야에 방문객 센터를 새로 개설하였다. 망원경 등 모든 전망 시설을 제공하는 방문객 센터는 연간 12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원래 1970년대에 설치한 케이블카는 경관을 덜 해치는 새로운 시설로 대체되어 많은 사람을 꼭대기까지 실어 나른다. 또 걸어서 꼭대기까지 힘들여 올라가는 노선 두 곳도 여전히 남아 있다. 모든 종류의 상행위와 꼭대기에서의 야유회를 금지하는 정책을 엄격하게 시행하고 있다.

유산면적
276㏊
완충지역
28,965㏊
참고번호
1040
본문

마사다는 고대 유대 왕국의 상징으로 1세기 후반에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디아스포라(Diaspora)의 운명을 걸었다. 마사다에 있는 헤롯 왕의 궁전은 초기 로마 제국의 화려한 별궁의 대표적인 예이다. 구릉을 둘러싼 병영과 요새는 가장 세련되고 완전한 로마 제국의 공성 보루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깎아지른 절벽에 우뚝 솟은 마사다의 구릉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굽어본다. 서쪽으로는 언덕과 단구가 많은 유대 황야가 펼쳐지고, 동쪽으로는 극도로 험한 지대가 찬란한 사해로 꼬리를 감춘다. 거대하고 가파른 벼랑이 남쪽 지평선(시리아-아프리카 지구대의 서쪽 벽)에 걸쳐 있으며 마사다는 이 벼랑의 일부를 이룬다.

북부 궁전이 주요 구조물인 북쪽 지역은 헤롯 왕 시대의 주요 단계(기원전 1세기 말)에 지금 같은 형태를 이루었다. 북부 궁전은 조금 다듬은 3개의 천연 바위 단구에 세워졌다. 본래 모든 부분을 모자이크 바닥과 벽화로 장식한 상층은 주로 거주 용도로 사용하였다. 북쪽에는 정원으로 둘러싸인 반원형 열주가 있는 테라스가 있다. 하층 2개에는 열주가 있는 인상적인 접견실이 있다. 2개 층에 모두 목욕 시설이 있었다. 하층 접견실은 3개 중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북부 궁전으로 들어가려면 창고와 식당, 그 주위와 아래쪽에 작은 욕실 등이 있는 마름모꼴 마당을 지나가야 한다. 지하에는 돌을 쪼아 만든 수조가 2개 있다. 북부 궁전 바로 남쪽의 작은 언덕에는 커다란 목욕탕이 있다.

서쪽 지역에는 헤롯 왕 시대의 주요 단계에 실질적으로 확장하고 재건한 서부 궁전이 있다. 침실과 접견실로 둘러싸인 안마당의 중심부에는 넓은 업무 건물이 2동 추가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 한 번 더 새로운 부속 건물을 추가해 확장하였다. 서부 궁전의 크기와 배치, 모자이크 바닥과 대리석 판을 모방해 하얀 벽토를 바른 벽이 있는 화려한 장식은 이곳이 의식용 궁전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북부 궁전은 왕과 왕실 가족의 개인 궁전이었다. 포대(砲臺)의 벽은 마지막 단계에 쌓았다. 1,290m 길이의 거대한 방어벽 안쪽에는 방이 약 70개 있고 탑이 27기 있다. 벽에는 서문과 남문, 뱀의 통로(동문)로 대문이 3개 뚫려 있다. 수없이 많은 깊은 수조들은 모두 3단계 때 마사다 바위에 파놓은 것이다. 첫 단계에 판 작은 수조들은 산꼭대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 놓았다. 주요 단계 때는 산꼭대기 아래에 두 줄의 수조를 파놓았다. 물은 마사다 서부의 와디(wadi, 우기 때 외에는 물이 없는 계곡이나 수로)를 통해 겨울 홍수기 동안 댐과 수로를 거쳐 공급되었다.

산꼭대기에 있는 건물은 대부분 유대교 열심당(Zealot) 시기에 1,000여 명이 기거했던 곳이다. 이 시기에 나온 가장 새롭고도 중요한 것은 유대 교회이다. 헤롯 왕 때 세워진 정사각형 건물은 아마도 마구간으로 사용한 것 같다. 3열의 의자는 초기 유대 교회의 특징으로 벽을 따라 만들었다. 뒷방 바닥 아래에는 성물고(聖物庫)가 있다. 의식용 욕조인 미크바(mikveh) 7〜8개는 서부 궁전 남쪽의 커다란 계단식 침례용 수조와 함께 확인되었다. 마사다 주위에는 로마 제국의 병영망이 8개 있다. 모든 로마 제국의 진지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수백 개의 콘투베르니움(contubernium, 로마 군대의 최소 편제 단위)이다. 이것은 병사들이 가죽 천막을 세웠던 높이 1〜1.5m의 석벽이다. 마지막 공격에 사용한 거대한 경사로는 흙과 돌을 쌓고 목재 버팀재로 보강하였다.

비잔틴 시대의 교회는 사실상 산꼭대기 중앙에 있다. 벽은 여전히 상당한 높이까지 남아 있는데, 헤롯 왕 때 세운 건물에서 빼온 가공된 백운석으로 지었다. 바닥은 본래 모자이크로 덮였으나 이 가운데 많은 부분이 19세기에 루브르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벽은 벽토를 발랐고 채색한 돌과 질그릇 조각으로 꾸몄다. 구조는 특징적인 직사각형 공간으로 되어 있는데, 동쪽 끝에는 애프스(apse, 보통 교회 동쪽 끝에 있는 반원형 부분)가 있고 서쪽 끝에는 나르텍스(narthex, 고대 기독교 교회당의 본당 입구 앞의 넓은 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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