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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푼구베 문화경관 [Mapungubwe Cultural Landscape]

  • 제목 : 마푼구베 문화경관
  • 설명 : © UNESCO / Author : Francesco Bandarin
마푼구베 문화경관

상세정보

  • 국가 남아프리카공화국(South Africa)
  • 위치 노던 주(Northern Province)
  • 좌표 S22 11 33|||E29 14 20.004
  • 등재연도 2003년
  • 등재기준

    기준 (ⅱ) : 마푼구베 문화경관은 900년~1300년 사이에 남아프리카 문화와 사회의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간 가치의 교류가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기준 (ⅲ) : 마푼구베 문화경관은 한때 아프리카 아대륙의 가장 큰 왕국이었던 마푼구베 왕국의 성장과 쇠퇴를 완벽하게 보여 주고 있다.

    기준 (ⅳ) : 마푼구베가 동아프리카 항구를 통해 아라비아, 인도와 무역을 하면서 강력한 국가가 된 것은 아프리카 아대륙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이다.

    기준 (ⅴ) : 마푼구베 문화경관의 유적은 기후 변화의 영향을 생생하게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변화에 취약해진 문화의 명백한 기록이며, 마푼구베 왕국의 성장과 쇠퇴를 말해 준다.

요약
마푼구베(Mapungubwe)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북쪽 국경 지대에서 짐바브웨와 보츠와나와 접하고 있다. 림포포(Limpopo) 강과 샤쉬(Shashe) 강의 합류 지점에 넓게 펼쳐진 사바나 경관이다. 마푼구베는 14세기에 사람들이 떠나기 전까지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왕국으로 발전했다. 현재까지 3곳의 초기 수도 유적이 남아 있으며, 궁전 유적과 취락 지구가 거의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다. 이 유적들은 400여 년간의 왕국의 사회·정치 구조 발달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목차
탁월한 보편적 가치

마푼구베 문화경관은 900년~1300년 사이에 남아프리카 최초의 토착 왕국이 번성하고 멸망한 모습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중심 지역이 거의 30,000㏊에 이르고, 약 100,000㏊가 넘는 완충지역이 설정되어 있다. 지조(Zhizo)로 알려진 유적지에는 수도가 3곳이 남아 있다. 슈로다(Schroda), 레오파드 코피에(Leopard’s Kopje), 마지막으로 마푼구베 구릉 주변에 수도가 있다. 수도에 딸린 마을과 림포포 강과 샤쉬 강의 합류 지점 주변의 비옥한 땅에는 왕국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마푼구베는 남부 아프리카에서 남북로와 동서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동아프리카 항구를 거쳐 인도와 중국, 남아프리카 전역으로 나가는 무역을 지배할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구하기 힘든 금과 상아를 내륙 지방에서 모아 교역하여 엄청난 부를 쌓았는데, 이러한 경제적 부는 중국의 도자기와 페르시아의 유리구슬 등의 수입품에서 알 수 있다. 이런 국제무역은 생각의 변화를 일으켰으며 건축양식과 촌락의 배치에도 변화가 생겼다.

13세기 말까지는 마푼구베가 아프리카대륙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내륙 정착지였으며, 그 문화경관 안에는 당시의 발달 과정에 대한 풍부한 정보가 있다. 신성한 통치력을 가진 지배 계급은 주변의 촌락에 사는 평민들과 왕을 분리시켰다. 그리고 무역을 지배했는데, 지배 계급들이 좌우한 무역이 어떻게 성장하고 발달했는지를 볼 수 있다.

마푼구베는 기후 변화 때문에 멸망하게 되었다. 마지막 두 세기 동안, 농경에 알맞은 따뜻하고 습한 기후였던 림포포 강과 샤쉬 강 유역에는 점점 차고 건조한 시기가 주기적으로 찾아들었다. 1300년 후에는 강수량이 감소하여 전통적인 농경방식으로는 많은 인구가 먹고살 수 없었다.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졌고, 마푼구베의 세력 기반은 북쪽 짐바브웨 왕국(Great Zimbabwe)으로, 후에는 카미(Khami)로 옮겨갔다. 오늘날의 동식물상과 림포포 강과 샤쉬 강의 합류 지점이라는 지형학적 특성을 고려할 때 이 위대한 왕국의 유적은 보편적 가치를 지닌 인상적인 문화경관을 창출하고 있다.

완전성

주요 촌락의 모든 유적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마푼구베 왕국의 흥망성쇠의 모습도 모두 남아 있다. 상당히 넓은 지역에 있는 우수한 문화경관은 사실상 훼손되지 않은 채 남아 있지만, 곧 해체될 가능성도 있다. 이곳은 현대적 감귤 농장과 원형 관개시설의 민간 소유 농경지 지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마푼구베의 마지막 단계인 대규모 농경은 사라졌다. 중요한 경관의 많은 부분이 야생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미개발 상태로 되돌아갔지만, 최근 유산 지역에 대형 사냥감이 개방되면서 특히 코끼리를 관찰하고 감시할 필요가 있다.

메시나 지역은 광산이 많은 지역으로, 리델(소규모)과 베네티아(대규모) 같은 다이아몬드 광산이 운영되어 유산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아직 발견되지 않은 다른 값비싼 광물이 아직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채굴권이 최근에 국가로 넘어가 앞으로는 잘 관리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유산의 경계에서 5㎞ 떨어진 곳에 있는 석탄 채굴 허가 지역이 림포포 강에 인접한 매우 민감한 지역이며, 등재 당시에 완충지역 안에 있어 상당한 위협이 되고 있다. 유적의 완전성은 1930년대의 발굴 기준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 기준은 귀중한 증거를 없앨 수 있다는 논쟁이 있어, 유산의 완전성은 물리적, 지적 조건에서 위태로운 상태이다.

진정성

등재된 유산과 완충지역은 버려진 이후로 인간의 간섭으로 파괴되지 않았으며, 현재의 농경활동은 문화경관의 가치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전에 발굴된 유물이 기후나 관광객 때문에 파괴되지 않도록 보호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배경

마푼구베는 13세기에 아프리카 아대륙에서 가장 큰 정착촌이었다. 그 이전에는 버려진 곳이었다. 600년에 걸쳐 주변에 다양한 촌락이 형성되었다. 이곳에 관한 전설과 이야기들이 대대로 전해지고 있다. 지방의 독일인 농민 카렐 모어셀(Karel Moerschell)이 1911년경 금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1930년에 와서야 마푼구베가 지닌 중요성이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32년 12월 31일에, 현지의 정보원이었던 모웨나(Mowena)가 반그라안(E.S.J. van Graan)과, 다른 네 사람을 이끌고 마푼구베 구릉의 그리프스왈드(Geefswald) 농장으로 가서 그곳에 있던 암각화와 금, 철 가공물과 도자기, 유리구슬을 찾아냈다. 거기서 발견한 물건들은 프리토리아 대학의 역사학과장 레오 포우체(Leo Fouche)가 언론을 통해 발표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대학은 그 땅의 주인인 콜린스(E.E. Collins)와 협상을 했다. 그리고 법적 협의를 통해 이 대학은 금과 다른 공예품에 대해 소유권을 가지게 되었고 발굴할 권리와 선택권을 보증받았다. 대학은 또 그리프스왈드에서 채굴·탐사와 관련한 활동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여 성사시켰다. 1933년 6월에는 정부에서 그리프스왈드를 매입하여 프리토리아 대학에 발굴할 권리를 주었다.

프리토리아 대학에서는 고고학 위원회를 설립하여 1933년~1947년까지 연구와 발굴을 감독했다. 짐바브웨 출신의 네빌 존스(Neville Jones) 목사와 스코필드(J.F. Schofield)가 1934년과 1935년에 고고학 국장이었던 반 리에트 로(C van Riet Lowe) 교수의 자문을 받아 처음으로 현장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는 마푼구베 구릉과 남쪽의 비탈과 두엄더미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주변에 있는 비슷한 다른 유적도 간략히 조사했다. 1935년~1940년까지 케이 투(K2)와 마푼구베 구릉에서 6회에 걸친 발굴 작업이 있었다. 이 발굴은 가이 가드너(Guy A. Gardner)가 감독했다. 그리고 거의 25년이 지난 후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메이어(Meyer, 1998)는 1933년~1940년 사이에 그리프스왈드에서 한 발굴 작업에 관하여 ‘신속한 대규모의 발굴 작업의 결과로 귀중한 공예품을 찾아냈다’고 설명한다. 남아프리카에는 고고학 전문가가 부족하고 효율적이며 전문적 발굴을 감독할 인원이 부족하여 연구에 어려움이 있었다. 또 철기시대를 연구할 과학적인 방법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고 남아프리카의 철기시대에 대해서는 사실상 고고학자들에게 알려진 바가 없었다는 사실도 연구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유적지에 묻혀 있던 많은 자료들이 세심하게 발굴되지 못하고 없어졌다. 이런 문제로 인해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매장된 물건들과 발굴한 물건들을 잃어버렸고 그 결과 과학적 자료가 부족하게 되었다.

고고학 연구의 다음 단계는 1953년~1954년과 1968년~1970년에 고고학과의 감독 하에 진행되었고, 그 다음은 엘로프(J F Eloff) 교수의 감독 아래 더 체계적으로 주로 남쪽의 비탈에서 집중적으로 진행되었다. 엘로프 교수는 1970년에 새로 설립된 고고학과의 학장이었다.

1970년~1995년까지 5년 동안, 프리토리아 대학의 고고학과에서는 초기의 연구를 검증하고, 교정하며 보완하여 확고한 자료를 만드는 일이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했고, 유적지의 주민들의 생활상을 재구성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1979년과 2002년 사이의 보고서에서는 인간의 유물과 동물 유물, 중국 도자기, 금, 유리구슬,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에 대해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프리토리아 대학 학생들이 유적지에 인접한 농장을 조사했다.

그리프스왈드는 1930년대 이후부터 국가 소유이다. 농장 관리는 1992년에 주의 자연보호 관리과에서 맡았으며, 1999년에 남아프리카 국립공원으로 관리가 넘어갔다. 세계유산의 경계를 제안할 때 벰베 돈골라 국립공원(Vhembe Dongola National Park)의 경계에 대한 제안도 있었는데, 여전히 협의 중에 있다. 3곳의 유산은 연속적으로 등재되어 이미 공고되었다. 덴 스타아트(Den Staat), 그리프스왈드, 레이달(Reidal) 지역은 자연경관 지역이며, 중요한 고고학 유적이 많이 있다.

남아프리카 국립공원의 목표는 유산 지역 내의 모든 토지를 매입하거나 소유주들과 계약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지역을 농경 지역이 아닌 자연경관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토지 협상에 관한 진행 과정이 등재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22곳의 토지 중에서 11곳에 대해 ‘원칙적 합의’가 된 상태이지만, 아직 정해진 일정은 없다. 현재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데, 일부는 림포포 강에서 물을 끌어오는 관개농법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고 있고, 일부는 사냥금지구역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또 일부는 데 비어스사의 소유로 물을 뽑아내어 저장하고 다이아몬드 채광 활동에 공급하고 있는데, 최고 활동 기간이 20년인 것으로 추정된다.

보존 및 관리 체계

마푼구베 유적과 완충지역은 국가유산자원관리법(1999년, No25), 세계유산협약법(1999년, No43), 국가환경관리법(1989년, No73)에 의거하여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유산은 또한 국가환경관리보호구역법 (2003년, No 57)에 따라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법률에서는 유산지역과 완충지역에서의 채굴이나 탐사를 완전히 금지하고 있으며, 모든 개발은 환경영향평가를 받도록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립공원(SANParks)이 유산 관리당국이며,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와 지역의 노력을 통합 조정하는 전체 관리를 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립공원은 현재 통합관리계획을 새로 정비하고 있다. 관계자들과 지역공동체가 공원 공개 토론과 여러 다른 방법을 통해 정기적으로 자문 회의를 열고 있다.

또한 림포포-샤쉬 초국경보존구역(TFCA)을 설정하기 위해 삼자양해각서를 작성하고 있다. 이 양해각서의 체결로 5,040㎢의 광대한 지역이 보존 구역으로 설정되면, 효과적인 완충지역이 될 것이다. 각 참여 국가는 한 곳에 집중하여 보존할 계획을 세웠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문화유산에, 보츠와나는 야생동물에, 그리고 짐바브웨는 생활문화에 전념하기로 했다. 유산을 오랫동안 보호하기 위해서는 통합관리방안을 완성하고 세계유산위원회에 완충지역 승인을 받아야 한다. 세계유산위원회의 제24차 회의에서 채택한 세계유산과 채광에 관한 기술 연수회의 권고에 의거하여 채광 허가를 고려해야 하며, 채광이 유산과 완충지역과 더 넓은 환경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유산면적
28,169㏊
참고번호
1099
본문

마푼구베 문화경관은 900년~1300년 사이에 남아프리카 문화와 사회의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간 가치의 교류가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마푼구베 왕국이 동아프리카 항구를 통해 아라비아, 인도와 무역을 하면서 강력한 국가가 된 것은 아프리카 대륙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이다. 마푼구베 문화경관의 유적은 기후 변화의 영향을 생생하게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변화에 취약해진 문화의 명백한 기록이며, 마푼구베 왕국의 성장과 쇠퇴를 말해 준다.

마푼구베 왕국은 16세기 중반에 역사에서 점점 사라져갔다. 가장 강성하던 시기에는 인구가 9,000명을 넘었으며, 중앙집권 체제의 계급사회였다. 풍부한 천연자원을 채굴하여 인도양 항구를 통해 아라비아, 인도, 중국과 교역을 하며 막대한 부를 누리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림포포 강과 샤쉬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어 범람원의 비옥한 충적평야가 있었으며, 이상적인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전에는 수렵과 채집을 하였으나, 500년경부터 철기시대의 농부들이 몰려들었다. 마푼구베는 집약 농업을 통해 인구 성장이 촉진되어 사회구조가 발달했고, 계급제도로 분화되었으며, 상아와 금의 교역을 통해 소박한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도시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마푼구베의 부와 사회적 구조는 3곳의 궁전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3개의 궁전은 900년부터 급격한 기후변화(일종의 소빙기)가 몰고 온 멸망에 이를 때까지 3단계를 거쳐 건설되었다. 남아프리카의 세력 기반은 북쪽 짐바브웨 왕국으로 옮겨갔다. 따라서 전체 유적은 남아프리카에 첫 번째 토착 왕국이 생긴 후 멸망에 이르는 연속 단계를 보여 주고 있다. 마푼구베의 경관 조건은 사방이 장관을 이루는 절경이지만, 발굴된 유적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 왕궁 유적, 1220년~1290년(마푼구베 왕국 시기)
이곳은 마푼구베의 풍요로움과 사회적·종교적·정치적 계급제도를 보여 주고 있다. 성공적인 집약 농업과 동아프리카 해안의 항구를 통한 국제무역에 기반을 두고 인구가 증가하여 발달했다. 무역을 통해 금과 상아를 중국과 인도에 수출하고, 그 대가로 도자기·유리구슬 등의 사치품들을 수입했다.

• 마푼구베의 발전을 보여 주는 고고학적 유물, 900년~1200년
지조(Zhizo) 유적은 최초의 개척 농민들이 강가에 정착을 한 곳이다. 가장 큰 촌락이 림포포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고원에 자리한 슈로다(Schroda)이다. 계급제도가 나타났지만, 여전히 전형적인 남아프리카의 촌락 모습이었다. 가옥들 주변에는 소 방목지가 크게 둘러싸고 있었다. 사람과 동물 모양(가축인 양, 염소, 소, 개) 토우들이 많이 발견된 것은 일종의 중앙 집권체제의 의식을 치렀음을 암시한다. 100년 후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슈로다를 버리고 레오파드 코피에(Leopard’s Kopje)라는 새로운 수도를 세웠다. 역시 철과 구리를 사용한 증거가 있다. 또 100년이 흘러 마지막 단계에는 마푼구베 구릉 아래에 새로 지은 궁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갔다.

• 초기 촌락 유적, 석기시대와 철기시대, 암각화
강 유역과 사암층 구릉 지역은 기후조건이 좋을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중심지가 되었다. 부시맨들의 조상이 수천 년 동안 이 지역에서 살았다. 26개 유적지에 석기시대 사람들이 거주한 흔적이 있다. 250년과 900년 사이에, 수렵과 채집을 하던 사람들이 점점 떠나고 900년 이후로는 철기시대의 농경을 하는 사람들이 마푼구베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 유적지 주변의 자연경관
광활한 경관은 유적의 배경이 되고 있다. 마푼구베의 마지막 단계인 대규모 농경은 사라지고, 중요한 경관의 많은 부분이 야생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미개발 상태로 되돌아갔다. 몇몇 농가들이 여전히 관개지에서 감귤류를 재배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계곡물을 끌어와 대규모 상업 영농과 목축을 한다. 이들 중 일부는 허가가 되었고 더 많은 계획이 뒤따라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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