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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먼 석굴 [Longmen Grottoes]

사진 없음 표시 이미지 룽먼 석굴

상세정보

  • 국가 중국(China)
  • 위치 허난성(河南省, Henan Province)|||뤄양시(洛陽市, Luoyang City)
  • 좌표 N34 28 0|||E112 28 0
  • 등재연도 2000년
  • 등재기준

    기준 (ⅰ) : 룽먼 석굴의 조각들은 인간의 예술적 창조성이 훌륭하게 발현된 걸작이다.

    기준 (ⅱ) : 룽먼 석굴은 오랜 기간에 걸쳐 확립된 예술 양식의 완전한 경지를 보여 주는, 아시아 지역의 문화적 발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기준 (ⅲ) : 룽먼 석굴의 뛰어난 석조물에는 중국 당나라의 고도의 문화 수준과 복잡하고 정교한 사회상이 응집되어 있다.

요약
룽먼(龍門)의 석굴과 벽감은 중국 북위(北魏) 후기~당나라(316~907)까지의 가장 거대하고 가장 인상적인 예술 작품의 집합체이다. 이 모든 작품들은 불교에 헌납된 예술품으로, 중국의 석조 미술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목차
유산면적
331㏊
완충지역
1,042㏊
참고번호
1003
본문

룽먼 석굴의 이 놀라운 석조물들에는 중국 당나라의 고도의 문화 수준과 복잡하고 정교한 사회상이 응집되어 있다. 또한 오랜 기간에 걸쳐 확립된 예술 양식의 완전한 경지를 보여 주는, 아시아 지역의 문화적 발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룽먼 석굴은 북위의 황제 효문제(孝文帝)가 수도를 뤄양(洛陽)으로 옮긴 493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 사업은 그 후 4세기 동안 계속되는데, 4단계로 뚜렷하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493년~534년으로, 집중적으로 석굴을 조성한 기간이었다. 이 시기에 석굴사원(石窟寺院)이라고도 알려진 최초의 석굴 고양동(古陽洞)이 만들어졌다. 이 공사에 200명 이상이 관여했다고 한다. 석굴 사업을 지휘한 것은 북위의 황제들이었다. 선무제(宣武帝)는 3개의 석굴을 만들었는데 두 개는 아버지 효문제를 기리기 위한 것이고 나머지 한 개는 어머니 문소태후(文昭太后)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빈양삼동(賓陽三洞)이라 알려진 이 석굴들을 완성하는 데만 24년이 넘게 걸렸다. 이 시기에 서산에 갖가지 크기의 여러 석굴들이 만들어졌으며, 이는 전체 석굴 가운데 약 30%를 차지한다.

두 번째 단계인 524년~626년에는 매우 적은 수의 석굴만이 만들어졌으며 크기도 상대적으로 작았다. 이는 수나라(581~618)와 당나라(618~907) 초기에 여러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난 민란 때문이었다.

세 번째 단계는 626년부터로 중국 불교가 다시 흥성하기 시작하는 당나라의 전성기 때였다. 이 시기에는 다시 한 번 석굴이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는데, 특히 뤄양에 상주했던 황제 고종(高宗)과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재위 기간이 룽먼의 예술적 전성기였다. 온갖 크기의 수많은 석굴들이 서산과 동산에 생겨났다. 이는 전체 석굴 가운데 60%를 차지한다. 봉선사동(奉先寺洞)에 있는 여러 개의 거대한 석상들은 이 시기 룽먼의 중국 예술 황금기를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으로, 진정으로 중요한 세계적 예술 걸작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이 밖에도 당나라 때에는 웅대한 자연 전경을 가진 수많은 불교 사원이 건축되었다. 지금은 대부분이 폐허의 모습이지만, 여전히 룽먼 문화유적지의 중요한 요소이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당 말기에서 북송 시대인 755년~1127년으로, 이 시기에는 룽먼의 석굴 조성 사업이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이는 당나라가 8세기 중반에 일어난 민란으로 뤄양을 잃은 후 다시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금나라와 원나라 때 일어난 전쟁의 시발이 되었고, 이로 인해 룽먼 석굴 사업은 끝이 나고 말았다.

명나라(1368~1644)와 청나라(1644~1912) 시기에는 룽먼 석굴의 위대한 예술적·문화적 업적이 국내외적으로 차츰 인정을 받으면서, 룽먼 석굴을 주제로 많은 학술 연구가 행해졌다. 1940년대에는 석상의 일부가 도난을 당하고 해외로 밀반출되기도 했으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이후로 유적지는 잘 보호되고 보존되고 있다.

룽먼 석굴은 중국의 유서 깊은 도시인 뤄양에서 남쪽으로 12㎞ 떨어진 곳에 있다. 입지조건을 보면, 전략적 요충지인 동시에 장엄한 자연미가 넘치는 두 개의 산 사이에 이허(伊河)를 끼고 있다. 강을 끼고 있는 동산(東山)과 서산(西山)은 강에 접하는 면이 매우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었는데, 다루기 쉬운 석회암질이라 여기에 석굴을 만들고 조각을 새겼다. 강 양쪽으로 총 2,345개의 벽감과 석굴이 있으며, 이 속에는 10만 개가 넘는 불상과 약 2,500개의 석비와 비문들, 60개 이상의 불탑이 있다. 서산 절벽 북쪽에는 수나라에서 당나라 시기(316~907)에 만들어진 50개 이상의 중대형 석굴이 있고, 동산 절벽에 있는 석굴들은 모두 당나라(618~907) 때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룽먼 석굴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것은 서산 남쪽 아랫부분의 정중앙에 있는 고양동이다. 석굴 사업을 지휘한 사람은 북위 황제 효문제로, 이 매혹적인 작품은 효문제의 개혁 정책을 지지했던 많은 귀족과 관료들, 종교인들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다. 고양동의 주벽에는 실물 크기보다 큰 대형 석상 3개가 세워졌는데, 중앙에는 석가모니 불상이 있으며, 양옆으로는 두 명의 보살이 자리하고 있다.

룽먼에서 가장 잘 보존된 석굴 가운데 하나인 황보공굴(皇甫公窟, 석굴사(石窟寺)라고도 함)은 서산의 남쪽에 있는데, 비문을 보면 이 석굴이 527년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굴 앞에는 목재 구조물을 본떠 만든 지붕이 있으며, 가로대에는 7개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석굴의 주벽은 실물보다 커다란 7개의 조각상으로 꾸며져 있다.

당나라 고종은 서산의 남쪽 아랫부분에 봉선사동을 만들었다. 675년에 완성된 이 석굴은 룽먼에 있는 당나라 때의 석조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석굴 안에는 9개의 거대한 석상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통통한 몸집에 자애로운 얼굴을 한 비로자나불상이 압도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 다른 석상들 역시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각각의 특징에 맞는 독특한 표정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