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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킨센스 유적 [Land of Frankincense]

  • 프란킨센스 유적
  • 제목 : 프란킨센스 유적
  • 설명 : © UNESCO / Author : Francesco Bandarin
프란킨센스 유적

상세정보

  • 국가 오만(Oman)
  • 위치 도파르(Dhofar) 주
  • 좌표 N18 15 11.988|||E53 38 51.324
  • 등재연도 2000년
  • 등재기준

    기준 (iii) : 오만에 있는 일단의 고고 유적지는 고대의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치품 중의 하나였던 유향의 생산과 유통을 대변하고 있다.

    기준 (iv) : 쉬스르 오아시스와 코르 로리 및 알 발리드 중계 무역항은 페르시아 만 지역에서 발달한 중세 시대의 요새화된 촌락을 보여 주는 뛰어난 사례이다.

요약
와디 다우카(Wadi Dawkah)의 유향나무(프란킨센스, Frankincense)들과 대상(隊商)들의 쉼터였던 쉬스르(Shisr, 또는 우바르(Wubar)) 오아시스 유적, 그리고 이들과 연관된 두 항구 코르 로리(Khor Rori)와 알 발리드(Al-Baleed, Al-Balīd)는 여러 세기에 걸쳐 이 지역에서 번성했던 유향 교역을 생생하게 설명해 준다.
목차
역사적 배경

쉬스르 오아시스는 철기시대에 이미 주요 전초기지로서 룹 알 할리(Rub al-Khali) 사막으로 들어가는 상인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에 비해서 코르 로리/숨후람 무역항은 기원전 1세기 말에 그 토대가 놓이기 시작하였는데, 요새화된 홍해와 인도양 사이에서 성장하던 해상 무역을 배경으로 하드라마트(Hadhramawt)의 왕 라드 얄루트가 건설하였다.

기원후 3세기 전반에 코르 로리가 쇠락한 후, 이를 대체하여 후기 이슬람 시대 해상 무역의 주된 역할을 할 새로운 항구가 필요했으며, 오늘날 알 발리드가 있는 그 자리에 코르 로리를 대신할 항구가 들어설 자리로 적당했던 것이다. 도파르 지역에서는 와디안도르(Wadi Andoor)·와디호가르(Wadi Hogar)·와디다카우의 자연 환경은 유향나무가 성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구역이었다. 와디다카우 공원은 매우 이른 시대부터 유향 검(gum, 수지)을 채집하였던 장소로서, 또 현재까지 자연 상태에서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대표적인 장소로서 자연 및 문화유산 후보로 선정되었다.

초기 인류(호모 에렉투스)가 동아프리카에서 출발하여 도파르에 도달한 것은 약 100만 년 전이었다. 그들의 횡단에 관한 증거 자료는 특히 예멘과 서부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적지를 포함하여 여러 고고 유적지에 잘 보존되어 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네지드에서 발견한 유물, 특히 쉬스르 주변 지역에서 발견한 유물에 비추어 판단했을 때 지금으로부터 약 100만 년 전에 도파르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20,000년~8,000년 전에 남부 아라비아가 혹독한 건기를 맞이하게 되자 반도의 대부분은 버려지게 되었다. 기원전 6000년 무렵 신석기 시대에 가축을 방목하여 기르는 유목민이 남부 아라비아에 도착하였다. 레반트(Levant) 지역에서 온 이 사람들은 점차 반도의 대부분 지역을 점유하였다. 그들이 소와 양, 염소를 방목하였다는 증거는 과거 강줄기와 호수가 있던 네지드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셈(Sem)족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은 고대의 원거리 무역로를 개척하였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의 수요에 대응하고자 유향을 거래하기 시작하였다. 글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기원전 3200년 무렵에 유향 교역이 양적으로, 수적으로 증가하였음을 보여 주는 증거가 남아 있다. 교역 상인들의 구체적으로 어떤 민족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구분 가능한 부싯돌 종류를 통해 유향 교역이 특히 도파르와 관련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기원전 2200년~기원전 1300년)는 도파르에 있어 쇠퇴의 기간이었다. 사람들은 언덕의 경계선으로, 마르지 않는 샘에서 가까운 살랄라 고원까지 물러나서 살았다. 그들은 예멘 지역에서 발달한 청동기시대의 촌락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낙타를 가축화하여 사육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구리 무역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해상 무역으로서 마시라(Masirah) 섬과 도파르는 연결되었다. 석호와 계단식 경작지가 역사상 처음으로 집중 개발되었으며 여전히 유향은 광범위하게 교역하였다.

철기시대(기원전 1300년~기원전 300년)에 이르러서는 특히 도파르 지역에서 동시대의 마라 사람들처럼 수수와 기장과 같은 농작물을 키우는 동시에 소와 염소, 그리고 이제는 낙타까지 방목하는 지역 거주민이 등장하였다. 남부 아라비아 국가들의 융성은 유향과 관련된 공식적인 교역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만들었으며, 그 교역 네트워크는 북예멘과 동부 아라비아로부터 이어지는 지속적 수요에 따라 서쪽에까지 이르렀다.

기원전 300년 무렵, 오늘날의 쉬스르가 있는 지역도 이 교역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2세기에 저술한 『지리학(Geographia)』 「주항기(周航記, Periplus)」 편에는 쉬스르 지역과 그 주민에 관한 좀 더 확실한 묘사가 나온다. 쉬스르와 살랄라 평원 유적지의 발굴 조사 결과 두 곳 모두 샤브와의 하다마리 주(코르 로리/숨후람) 안에 있었으며 그 토착 주민들이 유향 무역에 참여하였음이 밝혀졌다.

이즈음에 예멘에서 북동 방향으로 이주해 온 오만 출신 아랍인들이 사회적 관계와 경제생활에서 복잡한 상호작용의 당사자로서 무대에 등장한다. 쉬스르와 살랄라 해안에 남아 있는 유물이 제시하는 증거에 따르면 파르티아의 페르시아인들 역시 도파르에 영향을 끼쳤다. 역사적인 사료, 고고학적 증거 두 가지 모두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쉬스르는 우바르(Ubar, 아라비아의 잃어버린 도시라고 전해 내려오는 곳)이거나 아니면 프톨레마이오스가 말한 오마눔엠포리움(Omanum Emporium)일 가능성이 있다. 코르 로리는 1세기 무렵에 씌어진 『에리트레아항해지(Periplus Maris Erythraei)』에서 언급된 모샤리멘(Moscha Limen)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 시대에는 국내 교역도 계속해서 번성하였는데, 아마도 향과 말에 대한 수요가 많았던 덕분이었을 것이다. 수천 년 전부터 이미 발달한 인도와 계속해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도파르의 해안 지역은, 특히 아바스 조(Abbasid) 시대에 원거리 국제 무역에 참여하였다. 요새화된 포구와 항구, 소규모 정착촌은 서쪽으로는 홍해와 동아프리카, 동쪽으로는 인도와 중국에까지 이르는 유대 관계를 입증하는 장소이다. 알 발리드와 미르바트(Mirbat)도 계속 번성하여 중기 이슬람 시대에 정점에 도달하였다. 1450년 터키와 포르투갈의 침략으로, 철기시대와 이슬람 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교역 네트워크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 쉬스르
쉬스르와 바로 인접한 여러 곳에서 다수의 신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쉬스르는 살랄라에서 북쪽으로 약 180㎞ 떨어진 사막 안에 있다. 농경을 위한 수원이자 대상의 휴식처인 쉬스르 오아시스는 네지드에서부터 숨후람 항구에 이르는 유향 교역로 위에 있다. 이곳에는 철기시대의 요새도 자리 잡고 있었으며, 오아시스는 이슬람 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고고학적 증거들에 의하면, 이 지역은 초기와 중기 이슬람 시대까지 이용되었다. 하지만 기원후 1세기 말부터 점차 쇠락하여 3세기에 이르러서는 그 중요성을 잃고 말았다. 후기 이슬람 시대까지 유지되었던 남쪽 성벽을 따라 한정된 지역에만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 코르 로리/숨후람
숨후람(Sumhuram, Smhrm, ‘그의 이름은 위대하다’는 뜻) 항구는 기원전 1세기 말엽에 건설되었다. 명문화된 기록에 따르면 라드 얄루트가 도파르 향료의 교역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이 항구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향료와 교환하기 위해 면직물·옥수수·기름 등을 가져온 인도 선원들은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 줄 계절풍이 불기를 기다렸다. 지리학 고서에 ‘모샤’로 표기된 항구와 동일한 장소로 짐작된다.

숨후람 항구는 서기 1세기, 2세기 동안 아라비아 해 연안 지역의 교역촌(村) 사이에서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세력이 강한 샤브와 주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덕분에 이 작고 요새화된 항구 도시는 매우 부유해졌다. 당시 이 항구는 약 1㏊에 정도의 작지만 요새화된 도시였다. 그러나 3세기 전반에 붕괴가 시작되었고, 바닷물이 들어오고 자연 식생에 의해 침식됨에 따라 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 알 발리드
‘알 발리드’라는 이름은 ‘도파르(Dhofar)’, ‘두파르(Dhufar)’, ‘자파르(Zafar)’ 등 여러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던 마라 지역의 중세 도시에 대해 역사적으로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럼에도 고고학적 발굴 조사의 결과를 보면 철기시대 촌락의 흔적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비록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알 발리드는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잔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 시대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알 발리드가 매우 중요한 항구였다. 하지만 알 발리드 항구는 12세기에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13세기에 아랍의 지배자나 페르시아 침략자에게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아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포르투갈과 그 밖의 여러 유럽 교역 국가들에 의해 교역 형태가 급격하게 변함에 따라 그 도시의 운명이 갈라졌다.

• 와디다카우 유향 공원
고고학적 증거를 토대로 판단할 때, 남부 아라비아의 신석기시대 주민들은 아라비아 연안 지역에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오가는 장거리 교역에 종사하였다. 발굴 조사에 의하면 조가비와 흑요석이 교역 품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원전 제3천년기 후반의 유향 교역에 관한 문헌과 비문 자료 등도 있다. 그 자료들에 따르면, 이 시기에 메소포타미아 지역뿐만 아니라 이집트에서도 유향 교역이 번성하였음이 분명하다. 프톨레마이오스가 분명하게 밝혔듯이, 유향의 원산지는 유향나무(학명: Boswellia sacra)가 아직도 발견되는 도파르 지역의 세 구역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막의 가장자리인 북쪽으로 물이 빠지는 ‘와디’(wadi,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간헐하천)이다. 유향나무는 와디의 바닥 쪽에서 발견된다. 이 공원의 더 높은 지역에는 극한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아카시아 및 그와 비슷한 종의 나무가 있다. 유향 교역은 철기 시대 전반에 걸쳐, 이슬람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남부 아라비아의 또 다른 주요 수출품은 말(馬)이었다.

유산면적
850㏊
완충지역
1,243㏊
참고번호
1010
본문

오만에 있는 이 일단의 고고 유적지는 고대 지중해와 홍해 연안 지역에서부터 메소포타미아·인도·중국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사치품 중의 하나였던 유향의 생산과 유통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 고고 유적지는 신석기시대부터 후기 이슬람 시대까지 아라비아 반도 남부 지역에서 번성하였던 문명에 관한 놀라운 증거 자료이다. 쉬스르 오아시스와 코르 로리 및 알 발리드의 중계 무역항은 페르시아 만(灣) 지역에서 발달한 중세의 요새화된 촌락을 보여 주는 뛰어난 사례이다.

쉬스르는 살랄라(Salalah)에서 북쪽으로 약 180㎞ 떨어진 사막 안에 있다. 농경을 위한 수원(水源)이자 대상의 휴식처인 쉬스르 오아시스는 네지드(Nejd)에서부터 숨후람(Sumhuram) 항구에 이르는 유향 운반로 위에 있다. 이곳에는 철기시대의 요새도 자리 잡고 있었으며, 오아시스는 이슬람 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이 고고 유적지에서 가까운 곳에는 붕괴된 대형 석회암 돔이 있고, 그 안에는 샘이 영원히 흐르는 동굴이 있다. 석회암 블록을 이용하여 평면상 불규칙한 오각형 구조로 지은 요새의 성벽이 바위투성이의 노두(露頭) 위에 올라앉은 중앙 단지를 에워싸고 있다. 중간에 성벽이 끊긴 것으로 보아, 성곽이 2개의 폐쇄된 영역으로 나뉘어졌고 중세 시대에 수차례 개축과 확장이 이루어진 제법 커다란 건물이 솟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남부 아라비아의 전통에 따라 나침반이 가리키는 기본 방위로 방향이 잡혀 있었음을 알려 준다.

숨후람/코르 로리(지리학 고서에는 ‘모샤’(Moscha)로 표기됨) 항구는 도파르(Dhofar)의 향료 교역을 장악하고자 했던 라드 얄루트(LL’ad Yalut)가 1세기 말에 건설하였다. 향료와 교환하기 위해 면직물·옥수수·기름 등을 가져온 인도 뱃사람들은 그곳에서 겨울을 나면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줄 계절풍(몬순, monsoon)이 불기를 기다렸다. 항구는 기원전 1세기, 2세기 동안 이 연안 지방에서 발달한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세력이 강한 샤브와(Shabwa) 주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덕분에 이 작고 요새화된 항구도시는 매우 부유해졌다. 그러나 바닷물과 초목 등 자연 식생에 의해 침식되면서, 3세기 초반부터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코르 로리는 살랄라에서 동쪽으로 40㎞ 떨어진 지점, 달콤한 물이 나오는 곳(khor)의 동쪽 강둑 언덕 위에 있다. 요새의 유적은 바위가 동쪽과 서쪽으로 튀어나온 곳에 있다. 요새는 좀 더 넓은 방어 체계의 일부를 이루며, 그 세세한 모습이 아직까지 뚜렷하게 드러난다. 요새의 벽은 속에 돌무더기를 넣고 바깥을 다듬은 돌로 마무리하였다. 가장 요새화된 부분은 북쪽에 있고, 입구는 가파른 오르막길의 진입로 끝에 있다. 이 입구에는 문 3개가 잇달아 있는데 그 자체가 거대한 구조물이며, 좌우 양쪽에는 탑의 유적이 있다.

약간 높은 지대인 알 발리드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공급하는 코르(khor)가 있는 해안을 따라 확장되었다. ‘알 발리드’라는 지명은 마라(Mahra) 지역의 중세 도시에 대해 역사적으로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도시는 12세기에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13세기에 아랍의 지배자나 페르시아의 습격자에게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아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포르투갈과 그 밖의 여러 유럽 교역 국가들의 교역 형태가 급격하게 변함에 따라 그 도시의 운명이 갈라졌다. 대부분의 현장은 새로운 건축물을 건설하려고 돌을 빼내 쓴 결과 돌덩이로 뒤덮인 황량한 풍경이 되었다. 대모스크는 3면은 외부의 단(壇)으로 둘러싸여 있다. 내부에는 정원이 있으며, 4m에 이르는 첨탑은 원래 북동쪽 모퉁이에 있었다. 주 기도실에는 지붕을 지지하는 144개의 팔각기둥이 즐비하다. 대모스크는 때로는 부실한 건축으로 인해, 때로는 불안정한 지반 탓에 무너졌기 때문에 여러 차례 바뀌었다.

• 와디다우카 유향 공원
남부 아라비아의 신석기시대 주민들은 아라비아 연안 지역에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오가는 장거리 교역에 종사하였다. 발굴 조사에 의하면 조가비와 흑요석이 교역 품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원전 제3천년기 후반(메소포타미아뿐만 아니라 이집트와도 교역이 번성하였다)의 유향 교역에 관한 문헌과 비문 자료 등도 있다. 유향(프란킨센스)의 원산지는 아직도 유향나무가 발견되는 도파르 지역의 세 구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막의 가장자리인 북쪽으로 물이 빠지는 ‘와디’(wadi,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간헐하천)이다. 유향나무는 와디의 바닥 쪽에서 발견된다. 이 공원의 더 높은 지역에는 극한 환경을 이겨 낼 수 있는 아카시아 및 그와 비슷한 종이 있다. 이 시기에 남부 아라비아의 또 다른 수출품은 말(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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