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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우안 [Kairouan]

  • 카이로우안
  • 제목 : 카이로우안
  • 설명 : © UNESCO / Author : Alcoceba, Felipe
카이로우안

상세정보

  • 국가 튀니지(Tunisia)
  • 위치 카이로우안(Gouvernorat de Kairouan)
  • 좌표 N35 40 54.012|||E10 6 14.004
  • 등재연도 1988년(2010년 수정)
  • 등재기준

    기준 (i) : 9세기에 재건한 대모스크는 이슬람의 주요 기념물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건축학적 걸작이다. 작은 변화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이 기도하는 장소는 세로 135m, 가로 80m의 사변형 형태라는 기본 배치를 유지하고 있다. 대모스크의 남쪽 끝에는 다주식(多柱式) 기도실이 있는데 포르티코(portico)가 있는 대리석으로 된 ‘숲’을 이룬 원주들이 17개의 네이브(nave)를 떠받들고 있고, 이보다 더 작은 북쪽 끝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정사각형 형태의 3층짜리 미너렛이 가로막고 있다.

    기준 (ⅱ) : 대모스크는 특히 그 독특한 장식 모티프 때문에 여러 마그레브 모스크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게다가 삼문 모스크(866)는 건물 정면에 조각을 새긴 이슬람 모스크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준 (ⅲ) : 수많은 고고학 유적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대모스크, 삼문 모스크, 아글라브 분지를 보면 카이로우안이 이프리키야 헤지라의 초기문명을 훌륭하게 보여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준 (ⅴ) : 성벽과 성문들(바브 에트 토우네스, 바브 엘 코우카, 바브 에흐 초우하다)로 보호된 카이로우안의 메디나에는 구불구불 얽힌 도로와 안뜰이 있는 집들이 보존되어 있다. 메디나의 스카이라인은 미너렛과 모스크와 자위야의 둥근 지붕이 두드러진다. 외부 벽에는 몇 개 안 되는 작은 창문이나 아치형 출입구가 있지만, 벽 안쪽에는 중정을 두고 있어 넓고 개방적이다. 사회 경제적 변화의 영향에 취약해진 이 전통 건축물은 전체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소중한 유산이다.

    기준 (ⅵ) : 카이로우안은 성도이자 이슬람의 정신적 수도 중 하나이다. 마호메트가 죽은 지 겨우 38년 후에 건축되었으며 마그레브에 세워진 최초의 예배 장소인 대모스크 옆에는 시디 사하브 자위야가 있다. 이곳에는 마호메트의 동료 중 한 명인 아부 자마의 유해가 보존되어 있다. 과거 카이로우안의 일곱 군데 순례지가 모든 이슬람교도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메카의 순례지 한 군데를 대신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요약
670년에 세워진 카이로우안은 9세기 아글라브(Aghlabid) 왕조 때 번영을 누렸다. 12세기에 정치적 수도를 튀니스로 옮겼음에도 카이로우안은 마그레브(Maghreb: 리비아·튀니지·알제리·모로코 등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의 총칭) 제1의 성스러운 도시로 남았다. 카이로우안의 풍부한 건축 유산에는 대리석과 반암의 원주가 있는 대모스크(Great Mosque), 9세기의 삼문 모스크(Mosque of the Three Gates)가 있다.
목차
유산면적
68㏊
완충지역
154㏊
참고번호
499bis
본문

대모스크, 삼문 모스크, 아글라브의 분지(Basin of the Aghlabids), 그 밖의 여러 고고학 유적들은 카이로우안이 이프리키야 헤지라(Hegira in Ifriqiya)의 초기 문명을 간직하고 있음을 훌륭하게 보여 준다. 대모스크는 특히 독특한 장식 모티브로 인해 다른 마그레브 모스크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더욱이 카이로우안은 이슬람 정신의 수도들과 성도들 중 하나이다. 대모스크는 마호메트(무함마드)가 죽고 38년이 지난 후에 마그레브에 세워진 최초의 예배 장소이다. 대모스크 옆에는 시디 사하브(Sidi Sahab)의 자위야(Zawiya: 무슬림 기도처)가 있는데, 이곳에 마호메트의 동료들 중 한 명인 아부 자마(Abu Djama)의 유해가 보존되어 있다.

헤지라 50년(AD 670)에 오크바 이븐 나피(Oqba Ibn Nafìi)가 알 카이라완(al-Kayrawan)에 창설한 수비대는 이프리키야의 이슬람 개종의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수비대는 카이로우안에 일시적으로 주둔했던 것이 아니다. 카이로우안은 비잔틴 함대의 보복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해안과 668년 카이로우안을 점령했던 베르베르 족이 관할하던 산악지역의 중간 지점인 요충지에 있었다. 이 때문에 정복을 위해서 카이로우안은 필수적으로 차지해야 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Umayyad) 왕조와 바그다드의 아바스(Abbasid) 왕조의 권위를 대표하는 총독이 주재하는 이프리키야의 수도로 남았다.

아글라브 왕조가 아바스 왕조(800~909)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하면서, 카이로우안은 진정한 의미의 수도가 되었다. 대모스크는 836년 에미르 지야다드 알라 I세(Emir Ziyadat Allah I)가 세웠고, 862년~863년 에미르 아부 이브라힘 아흐마드(Emir Abou Ibrahim Ahmad)는 위대한 도시계획을 실행하여 재건하였다. 체리체라 데벨(Cherichera Djebel)로부터 36㎞의 수로를 통하여 끌어온 물로 채운 아글라브의 분지도 이 도시계획의 일부였다. 종교적·일상적으로 평화로웠던 기간에 아글라브 왕조는 총독 궁전을 내주고 왕(emir)들은 카이로우안에서 조금 떨어진 남쪽 알 아바시야(Al-Abbassiya)와 라카다(Raqqada)에 세워진 거처로 옮겼다.

시아파 이맘(imam: 이슬람 종교 지도자)인 파티마 오바이드 알라(Fatimid Obaid Allah)가 지배하던 때(910~934)에는 처음으로 카이로우안이 그 중요성을 상실했다. 오리엔트로 곧장 나아가려 했던 이맘의 팽창 정책에 따르면 916년에 건설한 새로운 수도 마흐디아(Mahdia)가 더욱 중요한 장소였던 것이다. 하지만 파티마 왕조는 카이로우안으로 다시 돌아왔고, 972년 파티마 왕조가 카이로(Cairo)로 이전하면서 2개의 수도 시대는 끝이 났다.

카이로우안은 10세기 이후부터는 세계 역사의 무대에서 멀어졌다. 이 도시는 종교적·정치적 문제를 많이 안고 있었다. 1057년 카이로우안은 힐랄 족(Hilalians)에게 침공·약탈당했고, 이로 인해 튀니스가 아프리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정치권력의 진정한 중심지가 되었다. 하지만 카이로우안은 여전히 이슬람 세계 전역을 통틀어 마그레브의 성도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메디나(medina: 구시가지)에서는 여전히 역사의 무게가 느껴진다. 메디나는 3㎞가 넘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벽 곳곳에는 성문(바브 에트 토우네스(Bab et Tounes), 바브 엘 코우카(Bab el Khoukha), 바브 에흐 초우하다(Bab ech Chouhada))이 나 있다. 메디나의 스카이라인은 미너렛과 모스크와 자위야의 둥근 지붕이 두드러지며, 구불구불한 도로망과 안뜰이 있는 집이 보존되어 있다.

외부 벽에는 몇 개 안 되는 작은 창문이나 아치형 출입구가 있지만, 벽 안쪽에는 중정을 두고 있어 넓고 개방적이다. 하지만 헤지라 초기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놀라운 기념물들은 최근에 만들어진 수많은 기념물이나 개축한 종교 건물과는 주의 깊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현대적 형태인 건물들은 대부분 지난 3세기로터 기원한다. 많은 우물과 분수를 찾아볼 수 있는 고대 벌집 모양의 골목길에는 굉장히 많은 집이 있으며 시장도 있어서 아직도 전통적이고 지속적인 도시 구조를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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