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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도바의 예수회 수사 유적과 대목장 [Jesuit Block and Estancias of Cordoba]

  • 제목 : 코르도바의 예수회 수사 유적과 대목장
  • 설명 : © UNESCO
코르도바의 예수회 수사 유적과 대목장

상세정보

  • 국가 아르헨티나(Argentina)
  • 위치 코르도바 지방(Province of Cordoba)
  • 좌표 S31 25 14.016|||W64 11 27.996
  • 등재연도 2000년‬
  • 등재기준

    기준 (ⅱ) : 코르도바의 예수회 수사 유적과 대목장은 남아메리카에서의 중요한 시기에 유럽과 토착민의 가치와 문화가 융합된 뛰어난 사례이다.‬

    기준 (ⅳ) : 예수회가 남아메리카에서 150년 이상 시행한 종교·사회·경제적 실험이 코르도바의 예수회 유적과 대목장이라는 독특한 물질적 형태를 만들어 냈다.

요약
코르도바(Cordoba)의 예수회 수사 유적(Jesuit Block)은 오래전 파라과이에 존재했던 예수회 관구의 중심지이다. 이곳에는 예수회 체계의 핵심적 건물들인 대학, 교회, 주거 시설 등과 5개의 대목장(Estancia)과 종교적·세속적 건물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곳은 17세기와 18세기에 걸친 150년에 걸쳐 시행된 예수회의 독특한 종교적·사회적·경제적 실험을 보여준다.
목차
역사적 배경

예수회는 성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St Ignatius Loyola)가 1540년 반종교 개혁의 일환으로 설립한 교단이다. 비기독교 국가에 설립된 선교회는 피정과 교육이란 수단을 통한 영적 지도를 주요 활동으로 삼았다. 예수회는 교단 자체의 법에 의해 다스려지는 위계질서가 엄격한 조직이다.

예수회는 프란체스코 수도회·도미니크 수도회 등 다른 기독교 교단보다 늦게 스페인령 아메리카 식민지에 도착했다. 1573년 제로니모 루이스 데 카브레라는 코르도바를 스페인 식민지 도시의 표준 모델인 체커 판 형태로 배치하였다. 예수회는 코르도바에 70개 지역 중 한 곳을 할당받았으나, 1599년까지는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았다.‬ 예수회 교단은 1607년 파라과이에 새로운 관구를 조직하기 위해 스페인의 수사 디에고 데 토레스를 파견했고, 코르도바에 대학을 설립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교육하기 위해 선교단을 파견했다.

1610년 예수회는 할당받은 지역에 처음으로 콜레지오 맥시모(Colégio Máximo)를 건설했으며, 콜레지오 맥시모는 설립 10년 안에 ‘교황청 대학교(Royal and Pontifical University)’가 되었다. 콜레지오 맥시모에서는 1599년 예수회 교단이 만들어서 전 세계에 전파한‘예수회의 교육 방법과 체계(Ratioatque Instituto Studiorum Societatis Jesu)’로 교육하였다. 이후 대학 건물과 교회, 교단 거주 시설을 포함한 다른 수도원 건물들이 건설되었다. 이 건물들은 1767년 이 지역에서 예수회 교단이 추방되기 이전은 물론이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변형되고 재건축되었다.‬

예수회는 영적인 활동 이외에도 대목장에서 농업, 직물 제조, 노새 사육 등의 경제활동을 통해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예수회는가 대목장을 소유하게 된 경로는 다양해서, 소유주가 죽으면서 유산으로 넘겨받은 것도 있고, 땅을 사들인 것도 있다. 알타 그라시아 대목장은 예수회에 입교한 알론소 니에토 데 헤레라(Alonso Nieto de Herrera)의 가축 목장이었는데, 그가 사망하면서 예수회 교단에 유산으로 남겼다.

한편 칸데라리아 대목장은 1678년 프란시스코 데 베라 이 뮤지카(Francisco de Vera y Mujica)가 기증한 땅에 세워졌다. 카로야 대목장과 산타 카탈리나 대목장은 1616년에, 헤수스 마리아 대목장은 1618년에 사들였다. 예수회가 추방된 이후 ‘세속적 권력의 소유물 위원회(Boards of Temporalities)’가 이들 대목장을 포함한 예수회의 재산을 경매에 넘겨 대목장은 개인 소유가 되었다.

유산면적
38㏊
참고번호
995
본문

코르도바의 예수회 수사 유적과 대목장(Jesuit Block and Estancias of Cordoba)은 남아메리카에서 중요한 시기에 유럽적 가치·문화와 토착 가치·문화가 융합한 예외적인 사례를 보여 준다.‬ 예수회는 프란체스코 수도회나 도미니크 수도회 등 다른 기독교 교단보다 늦게 스페인령 아메리카 식민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도 아메리카 남부 대륙에 대한 탐험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회에게도 기회가 제공되었다. 예수회 교단은 1607년 파라과이에 새로운 관구를 조직하기 위해 스페인의 수사 디에고 데 토레스(Diego de Torres) 를 파견했고, 새로운 관구의 중심인 코르도바에 대학을 설립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교육하기 위해 선교단을 파견했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1588년부터 순회 선교가 운영되고 있었다.

코르도바는 1573년 제로니모 루이스 데 카브레라(Jerónimo Luis de Cabrera)가 세운 도시로, 스페인 식민지의 표준 모델인 체커 판(chequerboard) 형태로 배치되었다. 다른 교단과 마찬가지로 예수회는 코르도바에 구획된 70개 지역 중 한 곳을 할당받았다.‬ 코르도바의 예수회 수사 유적은 예수회 체계의 핵심 건물인 대학, 교회, 주거 시설 등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회의 콜레지오 맥시모(Colegio Máximo)로 처음 시작한 코르도바 국립대학교 건물은 중앙의 개방된 공간(이전에는 식물원이었음)을 둘러싸고 배열되어 있다. 돌과 벽돌로 지어졌으며, 중앙의 정원 주위로는 널찍한 주랑이 늘어서 있다.

예수회 교회 건물은 서쪽 끝부분에 땅딸막한 탑이 2개 있는 거대한 돔형이다. 주로 석재로 건축되었고 위층은 벽돌로 지어진 단일 건물 구조이다. 내부는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주 제단과 설교단의 성화는 탁월한 바로크 양식을 보여 준다. 몬트세라트 성모마리아 국립학교(Colegio Nacional de Nuestra Señora de Montserrat) 건물은 대학교와 마찬가지로 2개의 개방된 공간 주위에 배치되어 있다. 이 건물 역시 예수회 유적의 다른 구조물과 같은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5개의 대목장은 17, 18세기의 150년에 걸쳐 이루어진 독특한 종교적·사회적·경제적 실험임을 보여 주고 있다.‪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한 알타 그라시아(Alta Gracia) 대목장은 처음에는 교회와 성직자 거주지, 노예와 노동자 숙소(파괴되어 현재는 없음), 가축 우리, 채소 재배지(현재는 없어진 상태), 저수지, 방직 공장과 그 외 다른 종류의 공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넓은 안뜰이 2개 있으며, 거주용 건물 2채와 교회 건물 1채가 사각형 뜰의 3면을 형성하고, 네 번째 면에는 정문이 뚫려 있는 높은 벽이 있다.

산타카탈리나(Santa Catalina) 대목장은 교회, 성직자 거주지, 노동자 숙소, 수련 수사의 집(붕괴되어 현재는 없음), 제분소 및 저수지로 구성되어 있다. 코르도바 산맥의 아름다운 경관에 위치한 농촌 시설로서 대목장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다. 중앙의 큰 뜰을 비롯해 3개의 뜰이 있다. 평면도상 라틴식 십자가의 형태를 한 교회는 위풍당당한 바로크 양식의 외형을 하고 있다. 농촌에 있는 헤수스 마리아(Jesús María) 대목장은 산타카탈리나 대목장과 동일하게 구성되어 있다. 수도원 건물이 중앙 안뜰의 두 측면을 감싸고 있고, 뜰의 다른 쪽 두 면에는 창고 건물과 높은 돌담이 자리하고 있다.‪

칸데라리아(Candelaria) 대목장은 다른 대목장과 달리 외부와 격리되어, 코르도바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농촌 지역에 위치해 있다. 다른 대목장보다 규모가 작으며, 예배당과 성직자 거주지, 노동자 숙소(현재는 철거되어 없음), 가축 축사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카로야(Caroya) 대목장은 대단히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경관은 다른 대목장보다 화려하며, 위엄 있는 조화를 보여 주고 있다. 제분소와 저수지가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규모가 아주 큰 안뜰은 수도원과 몬트세라트 성모마리아 국립학교 기숙사로 둘러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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