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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루이 섬 [Island of Saint-Louis]

  • 제목 : 생루이 섬
  • 설명 : © UNESCO / Author : Dominique Roger
생루이 섬

상세정보

  • 국가 세네갈(Senegal)
  • 위치 생루이 지역(Region of Saint-Louis)
  • 좌표 N16 1 40.008|||W16 30 15.984
  • 등재연도 2000년(2007년 확장)
  • 등재기준

    기준 (ⅱ) : 역사 도시인 생루이는 프랑스 식민 치하에서 서아프리카의 상당 지역에 교육과 문화, 건축, 공예와 서비스 발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아울러 중요한 가치를 공유하는 교류의 장이었다.

    기준 (ⅳ) : 서아프리카의 옛 수도인 생루이 섬은 자연 경관이 빼어나며 식민도시로서 중요한 사례이다. 또 이곳에서 발달한 식민지 정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요약
17세기에 프랑스 식민지 정착민이 건설한 생루이(Saint-Louis)는 19세기 중반에 도시로 발전했다. 이곳은 1872년~1957년에 세네갈의 수도였으며 서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중요한 문화적·경제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곳은 세네갈 강의 어귀에 있는데, 일정한 도시 배치와 부두 시스템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이 생루이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도시의 독특한 외관을 만들었다.
목차
탁월한 보편적 가치

생루이 섬은 서아프리카의 항구도시로 독특한 풍경을 자랑한다. 세네갈 강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어귀에 자리한 생루이 섬은 육지와 바닷물이 만나는 미묘한 결합으로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1659년 대서양 해안에 프랑스가 최초의 회사를 세우면서 생루이 섬은 유럽 무역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럽 상인들은 노예와 아라비아의 보석·금·가죽과 이밖에 다른 여러 가지 물건을 찾아 1년 내내 강을 따라 이 지역을 여행하였다. 이 작은 해안 도시는 식민지의 정치 중심지가 되었고 1902년까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FWA)에 속하였다. 이후 수도를 다카르(Dakar)로 이전하면서 생루이는 서서히 쇠퇴하였다. 생루이는 1902년까지 세네갈과 모리타니의 수도였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생루이는 프랑스 식민 체제 아래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뿐 아니라 아주 먼 지역까지 교육과 문화, 건축, 공예와 서비스 등에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생루이는 각종의 다양한 문화가 섞여 새로우면서도 동시에 이질적인 문화가 적용된 사회의 첫 실험실이었다. 게다가 문화의 통합을 발전·확산시키면서 프랑스령에 속한 서아프리카 지역의 권리 요구를 대변하는 장(場)이 되었다. 즉 생루이는 새로운 인본주의의 탄생에 기여했다.

생루이 섬 전역은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특히 하천의 제방이나 부두 그리고 페데르브 다리(Faidherbe Bridge)도 포함되었다. 생루이 섬의 유적지는 크게 북쪽과 남쪽 거주지 그리고 정부 청사가 있는 페데르브 광장(Place Faidherbe) 세 구역으로 나뉜다. 이 섬은 항만 시스템으로 둘러싸였는데, 이는 동서 방향으로 나 있는 섬의 모든 도로 번호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정부 청사(고대 도시의 요새 터)가 들어선 곳은 직사각형 모양의 중심부로서 군대 막사처럼 완벽하게 일정한 규격에 맞춰 도시를 설계하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발코니가 있는 집(balconied houses)’, ‘갤러리 하우스’, ‘아름다운 시그나레(Signares)’, ‘진기하고 독특한 포르투갈의 메종 베이스(maison basses)’는 생루이만의 정체성과 더불어 미학적 요소를 한층 더해준다. 경간(다리의 기둥과 기둥 사이)이 따로 분리되는 장엄한 페데르브 다리는 일부를 1897년 프랑스에서 들여왔지만 도시 계획은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획일적인 도시 배치와 부두 시스템, 식민 시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품격 건축물 덕분에 생루이 섬은 식민 도시로서 주목할 만한 전형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식민 행정에서 물려받은 유형 분류 체계(typologies)와 도시 계획 원칙을 근거로 도시의 동질성과 건축 양식의 일체감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완전성

개념상 유산의 완전성은 생루이를 둘러싼 바다와 부두 그리고 페데르브 다리를 포함한 섬 전체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사실로 확인된다. 2007년 완충지역을 확장, 섬 지역 유산에 추가하여 보호 정책을 수립하였다. 도시 발전을 위한 종합적인 계획을 엄격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으며, 완충지역 바깥에서 두드러지는 도시화 압력으로 말미암은 부정적 효과를 제때 완화해야 한다. 강 상류의 댐 건설과 잦은 홍수로 유산의 완전성이 위협받았지만 릴레이 운하(relay canal) 덕분에 이런 문제점은 일시에 해결되었다. 이러한 왕성한 추진력으로 취한 조치가 생루이 섬유산의 완전성을 유지시켜 주고 있다.

진정성

생루이 섬의 현재 외관에는 페데르브 총독의 비전이 담겼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직교하는 격자형 무늬를 도시에 적용하려고 했다. 도시 계획을 위한 변형이나 개조는 격자무늬 외에는 취한 적이 없으며 심지어 페데르브 다리조차도 아무런 개조나 변형도 가하지 않았다. 이 다리는 1897년 10월 19일 취임한 앙드레 르봉(André Lebon)이 세웠으며 지금은 도시의 상징물이 되었다.

이런 주목할 만한 유산은 중요 부분의 보수가 불가피했다. 그러나 생루이 섬이 지닌 유산의 진정성은 유지되고 있다. 이는 2008년 ‘생루이의 보호와 안정 계획 실행을 위한 법령’ 선포 이후 안정화 단계로 들어선 환경 조성과도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이후 각 분야의 복원 전문가 200명에게 지침을 전달하는 워크숍을 실시하고 있는데, 업그레이드된 전통 노하우, 전통 자재 사용 그리고 최고의 훈련과정을 적용해 이러한 역동성을 강화시켰다.

보존 및 관리 체계

생루이는 늘 관리의 대상이었으며 특별한 보호 조치의 혜택을 누렸다. 실제로 1928년 이후 생루이를 위한 종합 계획이 세워졌다. 2006년 유네스코 후원으로 생루이를 위한 보호 및 안정화 계획안이 나오기 전까지 수없이 많은 계획이 쏟아졌다. 보존 및 관리 메커니즘을 강화하려고 여러 가지 법률안이 만들어졌다.

특히 1971년 1월 25일 법률 71-12로 역사 지구의 기념물 보호법이 제정되었다. 1971년 1월 25일자 법률 적용과 그에 따른 법령이 1973년 73.746으로 제정되었다. 1975년 11월 17일자 지침 N° 012 771으로 등재된 역사 지구와 기념물의 출판에 관한 지침이 정해졌고, 2008년 6월 30일 생루이 섬의 보호 및 안정화 계획 적용에 관한 법령 N° 2008-694이 제정되었다. 이는 다양한 이해 당사자의 구체화된 행동에 근거를 둔 기능적인 관리 시스템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생루이 건축물 복원 및 보존 연합(ARCAS), 관광청, 생루이에 주재한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그리고 거주민 연합회들이 도시와 주 당국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모든 활동에 압력을 행사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인식 고양을 위해 노력한다. 이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표지판 세우기, 좋은 사례와 잘못된 사례에 관한 벽보 제작, 문화적 활동 조직(극장, 축제 등) 등으로도 가능하다. 생루이 보호를 위해 한결같이 활동하는 연합회의 탁월한 동원력은 이미 관리자로 지정되어 활기를 띠고 있는 ‘생루이 보호위원회’의 지원으로 강화될 것이다.

참고번호
956bis
본문

서아프리카의 옛 수도였던 생루이 섬은 독특한 자연경관을 지닌 식민도시의 보기 드문 사례이다. 생루이는 이 지역에서 발달한 식민 행정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서아프리카 지역에 이루어진 교육·문화·건축·공예·서비스 등 다양한 가치의 교류와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생루이 섬은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에는 무인도였다. 이곳은 왈로(Walo) 왕국에 속했고 15세기부터 포르투갈, 베네치아, 네덜란드 사람들의 탐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곳에 거주지가 생기면서, 특히 17세기에 주도권 다툼이 많았다. 1633년 프랑스는 최초의 회사인 케이프베르데사(Cap-Vert Company)를 세네갈에 세우기로 했다. 세네갈 강 어귀에 있는 이 섬은 1659년 프랑스 사람 루이 콜리에(Louis Caullier)가 이곳을 회사의 방어 시설로 채택하였다. 이곳에는 케이프베르데사에 뒤이어 다른 회사들도 설립되었다.

영국은 1693년, 1779년, 1809년~1817년에 생루이를 점령했다. 초기에는 사람이 지내기 힘들고 척박한 환경이었다. 대량의 굴(oyster) 껍데기 조개무지가 발견되어 석회 원료로 도로를 건설할 때까지 거주할 만한 건물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거주지가 생기고 상업 활동이 발달하면서 고무, 가죽, 금, 상아, 곡물류, 노예무역이 활발해졌다. 이에 덧붙여 교육에 필요한 학교도 필요하게 되었다.

19세기 초 이곳의 인구는 8,000명에 달했다. 1828년 종합 도시 계획을 세워 도시의 기본 참조 모델인 옛 요새에서 발달한 도로 패턴과 도시 발달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도시 발달은 루이 페데르브(Louis Faidherbe)가 총독으로 임명된 1854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생루이 섬의 도시화는 1854년~1865년에 진행되었다. 생루이는 1872년 세네갈의 수도로 선정되었고 1895년 서아프리카의 수도로 지명되면서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 생루이는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에서 선진 도시들의 중심지이자 문화와 예술 활동의 중심지였다. 1864년 3월 15일 서아프리카 최초로 생루이에 산업, 민족, 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같은 시기에 학교 시설, 공공기관과 여러 서비스 시설 그리고 최초의 세네갈 군부대와 무슬림 재판소가 세워졌다.

식민시대의 안정된 평화 덕분에 경제와 상업 활동이 발전했다. 그 결과 도시의 영향력이 커지고 팽창하게 되었다. 하지만 1902년 생루이는 서아프리카 수도 지위를 내놓았고, 1957년에는 세네갈의 수도 자리도 내놓았다. 이는 프랑스 주둔군의 철수를 의미하며 그들의 가족과 사무실, 프랑스 상점도 모두 물러가고 문을 닫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963년 세관 건물이 마지막으로 폐쇄되었다. 그러자 프랑스인의 인구는 급감하였다. 그러나 전체 인구는 꾸준히 늘어나 1960년에 55,600명, 1976년에는 90,000명, 1997년에는 150,000명에 달했다.

도시는 랑그 드 바르바리(Langue de Barbarie, 대양과 마주한 산등성이) 지역과 내륙의 소르 지역이 동시에 발달했다. 옛 시가지는 인구 과잉으로 낡은 건축물이 붕괴되거나 위험한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1983년 새로운 도시의 종합 계획을 마련하여 위험한 환경 상황을 규제하고 역사 지역 보호 정책을 보급하였다. 오늘날 도시는 경제는 어업과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관광 산업으로 활기를 되찾고 있다. 1992년 가스통 베르제(Gaston Berger) 대학이 개교했다. 최근 새 국제공항이 개항되어 생루이를 더 쉽게 방문할 수 있다. 생루이 역시 여느 아프리카 대도시처럼 관계 당국이 환경 문제와 토지 불법 사용과 같은 고민거리를 안겨주고 있다.

생루이 섬은 세 구역으로 나뉜다. 북쪽과 남쪽의 거주지 그리고 정부 청사가 들어선 페데르브 광장이 있는 도시의 중심부가 그것이다. 전체 거주 지역은 세네갈 강의 두 지류로 형성된 거대한 석호 안에 있다. 이 마을은 해안 지역과 내륙의 소르(Sor) 지역에서 갈라진다. 무스타파 말릭 가예(Moustapha Malick Gaye, 예전의 세르바티우스) 다리는 섬과 대양으로부터 섬을 막아주는 서쪽의 랑그 드 바르바리 산등성이로 연결되어 있다.

1897년에 개통된 페데르브 다리는 도시 중앙과 소르 지역을 연결한다. 옛 시가지 구조는 1828년에 건설된 직교하는 격자 평면 구조를 기초로 만들어졌다. 이는 기본 참조 모델인 옛 요새에서 발전한 도로의 패턴과 도시 발전을 규제하기 위해 계획된 구조이다. 이 섬은 항만 시스템으로 둘러싸였는데, 이는 동서 방향으로 나 있는 섬의 모든 도로 번호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도시 구조가 생루이만의 특별함과 개성을 더해 준다. 2, 3층으로 된 건축물들은 쇠창살과 목재 발코니, 붉은 타일로 마무리한 지붕, 목재 덧문이 달린 창문과 출입문의 형태에서 식민지 건축물의 건축학적·미학적 느낌을 풍긴다. 주요 역사 건축물에는 주 청사인 고대 요새가 첫 거주지가 형성된 섬의 중심에 있다. 건축물들은 몇 세기를 거치는 동안 실내 장식이 많이 변형되었다. 그러나 외부 장식은 추가 장식을 조금 한 것 외에는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주 청사 바로 옆에 자리한 성당은 시민들의 기부로 1828년에 완공되었다.

군대 막사(Rognat Nord와 Rognat Sud)는 1837년 페데르브 광장이 있는 도심에 건설되었다. 주 청사와 함께 이 건축물들은 세르바티우스 다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도시의 핵심부에서 고전 건축물 지역을 형성한다. 1825년부터 지방의회(Regional Assembly for the River)가 있었는데, 초기 형태는 매우 단조로웠다. 1839년 초등학교 건물로 확장되었다가 1873년 이후 식민지 기록 보관소로 다시 사용되었다. 이어 다양한 공공기관 터로 제공되었다. 이곳은 규모가 상당히 큰 단지로 벽기둥과 발코니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보수 공사를 하여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한 편이다. 1822년에 건립된 시민 병원을 포함해서 북쪽의 대 모스크와 다른 건축물은 1838년에 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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