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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Hwaseong Fortress]

  • 수원 화성 팔달문(남문)
  • 제목 : 수원 화성 팔달문(남문)
  • 설명 : 출처 : 문화재청
화성

상세정보

  • 국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 위치 경기도(京畿道) 수원시(水原市)
  • 좌표 N37 16 19.992|||E127 0 29.988
  • 등재연도 1997년
  • 등재기준

    기준 (ⅱ) : 화성은 그 이전 시대에 조성된 우리나라 성곽과 구별되는 새로운 양식의 성곽이다. 화성은 기존 성곽의 문제점을 개선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국의 사례를 참고해 포루, 공심돈 등 새로운 방어 시설을 도입하고 이를 우리의 군사적 환경과 지형에 맞게 설치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발달한 실학사상은 화성의 축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실학자들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유럽의 성곽을 면밀히 연구하고 우리나라에 가장 적합한 독특한 성곽의 양식을 결정하였다. 화성 축조에 사용된 새로운 장비와 재료의 발달은 동서양 과학기술의 교류를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기준 (ⅲ) : 화성은 분지로 이루어진 터를 둘러싸고 산마루에 축조된 기존의 우리나라 성곽과는 달리 평탄하고 넓은 땅에 조성되었다. 전통적인 성곽 축조 기법을 전승하면서 군사, 행정, 상업적 기능을 담당하는 신도시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화성은 18세기 조선 사회의 상업적 번영과 급속한 사회 변화, 기술 발달을 보여 주는 새로운 양식의 성곽이다.

요약
화성(華城)은 경기도 수원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곽이다. 정조(正祖)가 자신의 부친인 장헌세자의 묘를 옮기면서 읍치소를 이전하고 주민을 이주시킬 수 있는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방어 목적으로 조성하였다. 1794년 2월에 착공하여 2년 반에 걸친 공사 후 완공되었다. 성곽 전체 길이는 5.74Km이며, 높이 4~6m의 성벽이 130㏊의 면적을 에워싸고 있다.

처음부터 계획되어 신축된 성곽이라는 점, 거주지로서의 읍성과 방어용 산성을 합하여 하나의 성곽도시로 만들었다는 점, 전통적인 축성 기법에 동양과 서양의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점, 그 이전의 우리나라 성곽에 흔치 않았던 다양한 방어용 시설이 많이 첨가되었다는 점, 주변 지형에 따라 자연스러운 형태로 조성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는 점 등의 특징이 있다. 1801년에 간행된 화성 준공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통해 공사의 자세한 전말을 알 수 있다.
목차
완전성

성곽의 중요 부분인 성벽, 4대문 그리고 각종 방어용 시설이 모두 잘 보존되어 있어 군사시설이자 주거지역으로서의 화성의 모습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중요 건물을 포함해 유산의 모든 요소가 유산의 경계 안에 있다.

진정성

화성은 축조 당시의 특성이 잘 남아있어 높은 진정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의 피해를 포함해 부분적으로 파손된 곳은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엄격한 고증에 따라 전통적인 기술과 재료를 사용해 복원하였다.

역사적 배경

사도세자는 조선왕조 제21대 왕인 영조의 둘째아들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아버지 영조의 명령으로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정조는 영조의 왕위를 계승한 후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화성을 축성했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그 축성의 근본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 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다. 또한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 화성은 규장각의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해 만든 『성화주략(城華籌略)』(1793)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 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축성 당시 거중기 녹로(도르래 기구) 등 건축을 위한 새로운 기계를 고안해 큰 규모의 석재를 옮기고 쌓는 데 이용하였다.

수원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 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 있다. 수원 화성은 축조 이후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되어 없어졌으나 1975년~1979년까지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해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를 갖고 있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 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에서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아직 남아있다.

수원 화성은 축성할 때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 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남아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이었기 때문에 성곽 자체가 ‘효’ 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 외에도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지닌 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화성에는 이러한 효 사상과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 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 계산, 시공 기계, 재료 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화성이 성곽 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동시에 기록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수원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보존 및 관리 체계

화성의 전 영역과 팔달문, 화서문은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국가 지정 문화재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또한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500m 이내의 지역은 문화재보호법과 경기도 문화재보호조례에 따라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해당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건설 행위에 대한 사전 심의가 의무화되어 있다. 또한 ‘수원시 세계문화유산 화성 운영조례’는 화성 및 부대시설의 관람과 활용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화성 보존에 필요한 예산을 배분하고 보수와 유지 관리 및 주변 지역의 현상 변경에 관한 심의와 허가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이다. 수원시는 주기적으로 개정되는 지구 단위 계획을 통해 성곽 안팎의 건폐율, 용적률, 높이를 제한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문화재 현상 변경 처리 기준을 준용하고 있다. 또한 30명가량의 직원들이 배치된 수원시 화성사업소가 현장에서 유산을 관리하며 유산에 대한 상시 모니터링과 함께 3, 4년 주기로 전문가의 정밀 모니터링이 실시되고 있다.

수원시 조례에 따라 설립된 ‘수원화성운영재단’은 유산 관련 시설물의 위탁 관리, 관광 활성화, 수익 사업 등을 담당한다. 화성의 보존 관리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화성의 문화재수리는 해당 분야별로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시험에 합격한 공인된 문화재수리기술자가 담당한다. 화성의 보존에 있어 가장 큰 위협 요소는 목조건축물에 대한 화재 위험이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현재 CCTV와 무인 경비 장치를 설치하고 상황실을 운영하는 등 24시간 감시 체계를 작동시키고 있다. 잡초 역시 화성의 성벽에 해를 입힐 수 있는 요인으로, 이를 제거하기 위한 예산과 인력이 투입되고 있다.

참고번호
817
본문

수원 화성은 한국 건축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도시계획, 조경과 그에 관련된 예술에 있어서도 몇 세기에 걸쳐 큰 영향을 끼쳤다. 화성은 극동의 군사 방호 건축물의 전형이며 군사 건축사의 역사적 표본이다. 수원 화성은 군사, 정치, 상업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과 일본의 요새들과 구별된다.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는 그의 아버지 영조에 의해 부당하게 단죄되어 처형당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1776년, 영조의 왕위를 계승하자 그는 아버지의 유해를 풍수지리에 있어 가장 길한 장소인 화산에 이장하였다. 그는 아버지 영혼을 달래기 위해 근처에 용주사를 세우고 조정을 수원 팔달산 자락으로 옮겼다. 조정을 옮김으로써 정조는 당쟁을 끝낼 수 있었으며 왕권을 높이고 새 성 안에 있는 안전한 궁궐 내에 머물 수 있었다.

화성은 실학파의 거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 의해 설계되었다. 건축물은 전 영의정이자 형조판서였던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감독 하에 1794년~1796년 사이에 완공되었다. 『화성성역의궤』에 상세하게 묘사된 거중기, 도르래를 비롯한 다른 특수한 건축 장비들은 화성 건축을 위해 디자인되고 제작되었다.

화성 행궁과 제례를 진행하는 사직단을 포함한 다양한 건축물이 요새 주위에 건축되었다. 그러나 이 건물 중 일부는 뒤에 전쟁과 반란의 와중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오직 행궁의 부속 건물인 낙남헌만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성의 일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파괴되거나 피해를 입었지만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이 화성을 원래의 정확한 형태대로 복원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거대한 성벽은 팔달산 자락를 포함하는 지역을 둘러싸고 있다. 이는 규칙적이거나 대칭의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땅의 지형에 따라 건축되었다. 성벽의 둘레에는 네 개의 문, 수문들, 관측탑, 지휘소, 다연장 화살 발사탑, 화기 보루, 각진 탑, 비밀 문, 봉수 탑, 보루와 벙커 등 본래 48개의 방어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온전히 남아 있다. 각각의 총안 사이의 벽(merlon)에는 세 개의 총안이 있다.

네 개의 문은 중요 지점에 설치되었다. 남쪽의 팔달문과 북쪽의 장안문은 석재를 기본으로 한 2층 목조 건물이며, 측면에 경비하는 군사들이 머무는 공간이 있고, 불로 구운 벽돌로 지어진 반달형 V자 보루들에 의해 차폐되어 있다. 이들 문은 수원 화성을 통과하는 주된 도로와 연결되어 있다. 서쪽과 동쪽의 건물은 1층짜리 건물들이며,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도 역시 V자 보루들에 의해 보호되었다.

1964년에 성의 복원과 재건축 작업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각진 탑들, 지휘소, 관측탑, 보루, 그리고 다른 방어 시설들이 모두 튼튼하게 건축되었으며 최대한의 효율과 최소한의 노출을 위해 전략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둘러싼 성벽과 문, 탑, 보루 등 기념물은 재료와 기법의 측면에서 진정성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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