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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 [Historic Villages of Korea : Hahoe and Yangdong]

  •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
  • 제목 :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
  • 설명 : © UNESCO / Author : Seong Joon Cho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

상세정보

  • 국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 위치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시(安東市)|||경주시(慶州市)
  • 좌표 N36 32 21|||E128 31 0
  • 등재연도 2010년
  • 등재기준

    기준 (ⅲ) :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은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대표적인 씨족 마을의 예로서, 조선 시대 초기의 특징인 촌락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마을의 입지와 배치와 가옥의 전통에서 두 마을은 500여 년 동안 엄격한 유교의 이상을 따라 촌락이 형성되었던 조선 시대의 유교 문화를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다.

    기준 (ⅳ) : 하회와 양동 두 마을은 한반도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조선왕조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양반과 평민 가옥들의 전체적인 배치와 개별적 배치의 조화는 조선왕조의 힘과 영향력이 문학과 철학적 전통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와 문화적 전통에도 배어 있음을 의미한다.

요약
14세기~15세기에 조성된 하회(河回)마을과 양동(良洞)마을은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씨족 마을이다. 숲이 우거진 산을 뒤로 하고, 강과 탁 트인 농경지를 바라보는 마을의 입지와 배치는 조선 시대(1392~1919) 초기의 유교적 양반 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 옛 마을은 주변 경관으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자양분을 함께 얻을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에는 종가와 양반들의 기거했던 목조 가옥, 정자와 정사, 서원과 사당, 옛 평민들이 살던 흙집과 초가집 등이 있다. 17세기~18세기의 시인들은 정자와 쉼터에서 마을을 둘러싼 강과 산과 나무의 경치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시를 지어 노래했다.
목차
탁월한 보편적 가치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은 500년 동안 조선을 통치하였던 양반들의 문화가 꽃핀 한반도의 남동부 지역에 있다. 두 마을은 거리상으로 90㎞ 정도 떨어져 있다. 두 마을은 14세기~15세기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18세기~19세기 후반에는 규모도 커지고 구성도 확대되었다. 두 마을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 마을 입지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이고, 지역의 기후 조건에 적합한 건물의 형태와 유교 예법에 맞는 가옥으로 이루어졌다.

마을에는 씨족 마을의 대표적 요소인 종가와 양반들이 살았던 크고 튼튼한 목조 가옥, 정자와 정사, 유교 서원과 서당 등이 남아 있다. 또한 평민들이 살았던 단층의 작은 흙집과 초가지붕을 얹은 초가집들도 있다. 정자와 휴식처에서 보이는 마을 주변의 산과 나무, 강의 경치는 17세기~18세기 시인들이 시로 읊었을 만큼 아름답다. 두 마을의 전통 가옥들과 마을의 입지와 배치가 이루는 탁월한 조화는 조선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잘 보여 주는 사례로 꼽힌다. 특히 씨족 마을의 형성이라는 특징적인 체계는 이 지역에 고유한 것으로 500여 년 동안 발전되어 왔다.

완전성

씨족 마을의 대표적인 구성 요소인 양반의 가옥과 평민의 가옥, 공간 배치의 형식, 서당과 서원 등이 유산으로 등재된 이 두 마을에 있다. 하회마을에는 동쪽 4㎞ 지점에 병산서원(屛山書院)이 있고, 양동마을에는 옥산서원(玉山書院)과 동강서원(東江書院)이 마을에서 각각 8㎞, 4㎞ 떨어진 곳에 있다.

문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강과 숲, 산이 어우러지는 조화로운 경관은 하회마을에서 주로 볼 수 있고, 양동마을에서는 그 완전성이 약간 떨어진다. 양동마을에 흐르는 안락천 개울과 수운정(睡雲亭)에서 바라보이는 안강평야와 산등성이는 등재 지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 유산은 최소한의 부작용 외에는 개발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으며, 방치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양동마을의 환경은 다리와 도로, 철도 등의 새로운 사회기반시설의 건설로 일부 훼손된 바 있다.

진정성

씨족 마을의 요소들이 보여 주는 보편적 가치는 가옥과 마을 배치의 우수성과 관련되어 있고, 주변 환경과 씨족 마을의 의식은 유교 전통에 의해 형성된 조선 시대 정치 체제와 문화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이 마을들이 위계에 의해 형성된 촌락의 배치와 영향력 있는 씨족과 학자들의 표상을 잘 보여 주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복원할 때 쓴 재료로 인해 유산의 진정성이 약간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하회마을에서 건축물의 일부를 새롭게 이용하기 위해 재료를 바꾸었는데, 이러한 변경은 때때로 보편적 가치에 기여하는 조선 시대의 재료와 기술, 배치, 건축물의 우수성을 흐리게 한다.

보존 및 관리 체계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은 1984년 이후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보호되고 있다. 하회마을의 문화유산 보존지역에는 완충지역을 두고 있고, 어떤 경우에는 보존지역이 더 확대되기도 한다. 양동마을의 문화유산 보존지역에는 촌락 지역, 약간의 완충지역, 동강서원을 제외한 유산지역 외곽 그리고 독락당(獨樂堂)을 제외한 약간의 완충지역이 포함된다. 마을에 있는 건물과 가옥 및 숲도 법에 따라 보존되고 있다. 또한 하회마을의 가옥 124채 중 여섯 채와 양동마을의 149채 중 가옥 두 채가 보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정부는 문화유산정책 중장기 발전계획, 문화유산 2011(2007), 민속마을의 보존과 이용 및 종합 관리를 위한 세부이행방안(2004), 하회마을 설계지침(2007), 양동마을 설계지침(2007) 등을 수립하여 시행하고 있다. 경상북도는 문화유산의 지정부터 보존, 관리, 활용에 이르는 전반적인 사항을 관리하고 있다. 동강서원은 경상북도에서 보호, 관리하고 있다.

안동시는 문화유산 보호조례(2004)를 제정하여 하회마을의 보존과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또한 하회마을 종합정비계획(2002), 2016년까지 안동시 도시계획안(1998), 하회관광복합단지 개발계획(2003[1998]) 등도 시행하고 있다. 각 건물들의 유산으로서의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건물에 복원 기술과 재료에 관한 세부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아름다운 경관의 훼손을 막기 위해 숲, 나무, 강 주변을 포함한 전체 경관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또한 관광객의 방문이 크게 늘어나고 있으므로, 건물의 수용력과 주민들의 수용 능력에 관한 관리 계획도 마련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화재 방지와 화재 대응 체계의 기준 마련이 가장 시급하다.

유산면적
600㏊
완충지역
885㏊
참고번호
1324
본문

씨족 마을이 융성했던 조선왕조는 한반도 전체를 통치하며 한국 사회에 유교적 이상을 실현했다. 또한 중국과의 교역을 통하여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한국 전통의 과학기술과 문화를 발전시켰다.

풍수지리에 따라 지역의 지형과 조화를 이루며 마을이 형성되는 풍습은 그 이전 고려 시대에 나타났다. 하지만 지주들과 향촌 관리들인 양반이 유교적 풍습에 따라 새로운 마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거나 새로운 마을을 조성해 나간 것은 조선 시대에 있었던 일이었다.

보통 씨족 마을에는 한 성씨 또는 두 성씨의 양반들이 성곽을 쌓아 마을을 지키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를 비롯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이러한 씨족 마을에서 문관과 무관이 배출되기도 했다.

하회마을은 고려 시대 말에 허씨와 안씨, 그리고 류씨 성의 세 씨족이 새로운 양반 정주지를 찾아 형성한 마을이다. 16세기 말에 류씨 가문은 걸출한 정치가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이는 마을의 건축물, 특히 정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후 마을은 번성했으나 17세기 말에 허씨와 안씨 일가가 마을을 떠나면서 류씨 단독의 씨족마을이 되었다. 마을은 18세기~19세기까지 계속 커져 갔다. 1980년대에 들어와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고 1991년에는 초등학교가 폐교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전통 가옥 두 채가 새로 지어지면서 이런 추세가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양동마을은 이씨와 손씨 씨족의 혼인으로, 처가에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로 성장한 정주지의 예이다. 이 두 씨족은 16세기에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마을은 두 씨족의 일가들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갔다.

20세기 초, 마을에 철도가 건설되고 학교가 지어졌다. 1940년대에는 사찰이 세워졌고 10년 뒤에는 교회도 들어섰다. 1970년대에는 안락천에 다리가 놓이고, 1971년에는 안강평야의 농경지를 재정비하여 마을의 공동 저장고를 지었다. 1980년대에 이 마을은 한국의 다른 마을들처럼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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