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이동하기

시에나 역사 지구 [Historic Centre of Siena]

  • 시에나 역사 지구
  • 제목 : 시에나 역사 지구
  • 설명 : © UNESCO / Author : F. Bandarin
시에나 역사 지구

상세정보

  • 국가 이탈리아(Italy)
  • 위치 토스카니 주(Tuscany)|||시에나 지역(City and Province of Siena)
  • 좌표 N43 19 7|||E11 19 54
  • 등재연도 1995년
  • 등재기준
요약
시에나는 피렌체와 도시 개발권을 놓고 경쟁을 벌였던 중세 도시의 전형이다. 시에나는 12~15세기에 고딕 양식의 도시로 발전했으며 이러한 건축물들이 수세기 동안 보존되어왔다. 이곳에서 활동한 두초(Duccio), 로렌체티(Lorenzetti) 형제와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 같은 화가들은 이탈리아와 유럽의 예술 사조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캄포(Campo) 광장을 중심으로 조성된 시에나는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지도록 고안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목차
역사적 배경

주요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아르시아(Arsia)와 엘사(Elsa) 계곡 사이에 있는 시에나는 도시가 성장하기에 좋은 지리적 조건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트루리아 인들은 기원전 29년에 이곳에 정착했다. 그리고 시에나는 ‘사에나 율리아(Saena Julia)’라는 이름을 얻으면서 출발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로마로 향하는 도로망이 시에나 반도의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롬바르드족과(568~774)와 프랑크족이 통치하던 시대에, 시에나는 잠시나마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 중세 도시는 1,000년 동안에 걸쳐 순례자들이 로마로 향해 지나는 순례길(Via Francigena)과 함께 성장하였다.

카스텔베키오(Castelvecchio)와 인접한 높은 지대에 있는 고대 카스트룸(Castrum)의 영토 오른쪽으로는 중세마을 중심지였던 산타마리아(Santa Maria)가 있다. 5세기에 초에 주교령에 속하게 된 산타마리아의 북쪽에서 성장한 카몰리아(Camollia)와 남쪽에서 성장한 산타마르티노가 이후 산타마리아 안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마을의 중심은 로마와 피렌체, 마렘마(Maremma)에서 온 길들이 만나는 트리벤툼(triventum)과 크로체 델 트라발리오(Croce del Travaglio)로 옮겨 갔다. 그 결과, 이 도로들의 교차로에 있는 광장은 무역과 상업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귀족 가족들은 요새화된 마을에 살았는데, 요새화된 마을 안에는 봉건 커티(curtis)에 중앙 안뜰이 있었다. 이것은 우구르게리(Ugurgeri) 가문과 말라볼티(Malavolti) 가문에게서 아직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186년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프리드리히 1세(1122~1190)가 이 도시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자체적으로 마을의 영주를 뽑고 주화를 주조할 권한을 부여했다. 시에나의 도시 구조는 11세기 말부터 15세기 초까지 300년 이상 발전을 거듭했다. 이 기간 동안 다소간 대내외의 분쟁이 있었다. 분쟁의 사건들은 대체로 직접적으로 교황과 황제 사이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영토 확장에 관한 시에나 공화국의 정책은 경쟁국가인 황제 당원 피렌체(Ghibelline Florence)에 대한 부러움에서 촉발되었다.

12세기 초부터 두 도시는 몬타페르티(Montaperti) 전투(1260) 등 지금까지도 잘 알려진 일련의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졌다. 전투에서 승리한 시에나 시민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성모 마리아와 콜레 디 발 델사 대교구(Colle val d’Elsa, 1269)의 보호 하에 두게 하였으며, 이후 겔프파(Guelphs, 중세 이탈리아의 교황파)가 시에나에 설립되었다.

도시는 로마 법왕청 귀족 가족들의 금융 활동, 특히 북유럽·마르세유·콤파냐·런던에 있는 거대한 국제 시장 덕분에 더욱 번성하게 되었다. ‘비아 반치 디 소프라’와 ‘비아 반치 디 소토’라는 은행과 관련된 거리에서 과거의 번영을 짐작할 수 있다. 정치권에서 세력을 장악한 상공인들의 압력으로 도시는 제2도로망과 고딕 양식의 공공 및 일반 건축물을 새롭게 갖추게 되었다. 시에나는 9인 정부(1287~1355)를 두는 정치제제를 갖게 되었고 이때에 상대적으로 정치적 안정기를 누렸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은 캄포 광장의 평면배치와 푸블리코 궁전의 건축물과 같은 도시의 건축물에 지속적인 역사적 흔적을 남겼다.

시에나 학파의 회화는 13세기 후기의 회화작품을 특징짓는다. 당시의 회화작품은 두키오 디 보닌세냐(Duccio di Boninsegna, 1260~1318), 시모네 마르티니(1284~1344), 피에트로 형제, 그리고 암브로조 로첸체티 등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이다. 시에나는 밀라노, 나폴리, 프랑스와 외교 관계를 유지했으므로 시모네 마르티니는 나폴리의 앙주와 만났다가 1339년 아비뇽으로 떠났다. 시에나와 예술가들의 이러한 관계는 14세기 중엽 서양 예술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420년과 1555년 사이에는 많은 일이 벌어졌다. 시에나 공화국이 종언을 고하게 되고, 상인들이 정부를 운영하려고 하였으며, 판돌포 페트루치(Pandolfo Petrucci, 1487~1525)가 귀족 정치를 도입하려고 시도하였고, 황제 카를 5세(Charles V, 1530)는 시에나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내정 문제는 황제와 프랑스와의 관계를 점점 더 밀접하게 만들었다. 1552년 그 도시를 2년 동안 점령했던 제국의 군대는 프랑스 편에 충성을 바친 시에나 사람들에게 쫓겨났다. 방어벽이 강화되었고 성문의 일부도 보강되었으며 교외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1555년, 도시를 지키던 블레즈 데 몽뤼크(Blaise de Montluc)는 황제군에게 굴복해 도시를 넘겨주게 되었다. 필리프 2세는 시에나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반면 토스카나 주의 공작령을 합병시켰다. 이로써 도시의 금융과 상업 활동이 위기에 빠지면서 경기가 침체되었다. 이후 도시는 농업활동에 집중하였다.

1348년 흑사병이 돌자 도시 인구는 25,000명에서 16,000명으로 줄었다. 이후 궁정과 교회와 수도원들을 재건하고 확충하려는 재건 사업이 시작되었다. 1457년 시에나는 이전의 화려한 명성을 되찾고,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Enea Silvio Piccolomini)가 교황 비오 2세(Pius II)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14세기 도시의 자부심인 프란치스칸 베르나르디노 알비체스키(Franciscan Bernardino Albizzeschi)와 카테리나 베닌카사(Catherina Benincasa)가 성인으로 공표되었다.

르네상스 예술 작품을 꽃피우려는 피콜로미니 가문의 노력으로 파파 로자(Loggia del papa), 피콜로미니(palazzo) 궁과 파페세(papesse) 궁 등의 뛰어난 건축물이 건축되었다. 그렇지만 마르실리(Marsili) 궁(1458), 대주교의 궁(1718) 등 15세기와 그 이후의 많은 예술 작품에는 여전히 고딕 양식이 주요했다. 이후 시에나는 토스카나의 공작령 속했다가 1849년에 이탈리아 왕국으로 예속되었지만, 19세기의 산업 발달에 대해서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도시는 성벽 바깥으로 분산되어 소규모로 확장되었으며, 때로는 역사 지구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언덕 위에 자리 잡기도 했다.

유산면적
170㏊
완충지역
9,907㏊
참고번호
717
본문

시에나는 중세 시대의 특징과 가치를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잘 보존하고 있는 도시이다. 이곳의 예술과 건축 그리고 중세 시대의 도시 설계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시에나 역사 지구(Historic Centre of Siena)는 7㎞ 길이의 성벽(14~16세기)으로 구분되며, 성벽은 도시가 자리 잡은 3개 구릉의 등고선을 따라 이어진다. 피렌체의 거리에 있는 카몰리아 문(Porta Camollia)처럼, 전략적 지점에는 2개씩 문이 있는 성벽과 부속 포루와 망루들이 갖추어져 있다. 서쪽 편은 1560년 메디치에 의해 재건되고 1580년에 새로 건설된 산타 바바라(Santa Barbara) 요새를 에워싸듯 형성되어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확장이 된 역사 지구의 성벽은 25㎞ 거리의 갤러리 네트워크의 일부와 보티니(bottini)를 포함하고 있다. 보티니는 지하수로망으로 연결된 저수조로, 지하수를 보티니에 저장해두었다가 지상의 분수로 내보내 물을 이용하도록 하였다. 시에나는 노련한 산 갈가노(San Galgano) 수도사들의 경험 덕을 본 것은 분명하다. 13세기에 만들어진 중앙 분수대들은 고딕 양식의 포르티코(portico)와 유사한 건축물이다.

역사 중심지는 3개의 주요 간선 도로가 크로체 델 트라발리오(Croce del Travaglio)를 중점으로 해서 만나게 되어 있는, Y자형으로 구획되어 있다. 크로체 델 트라발리오는 캄포 광장이로 대표되는 곳이며 이곳은 다시 작은 길들로 갈라져 나가게 되어 있다. 주요 거리를 따라 열을 지어 서 있는 주택과 궁전들은 두드러지는 몇몇 건물과 함께 독특한 도시의 공간을 연출해 내고 있다. 세 길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있는 캄포 광장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가장 훌륭하게 만들어진 개방형 광장 중 하나이다. 이 광장은 중세 도시의 성장과 도시 공동체 권력의 대두와 때를 같이하여 형성되었다. 프란치제나 거리(Via Francigena)의 절반과 오늘날의 ‘비아 반치 디 소프라(Via Banchi di sopra)’와 ‘비아 반치 디 소토(Via Banchi di sotto)’ 거리의 전 구간에는 금융과 상업 활동이 집중되었으며, 캄포 광장에는 두 구역으로 나누어진 시장이 들어섰다.

12세기 말, 도시자치 정부는 반원형(부채꼴 모양)의 개방형 광장을 만들기 위해 두 구획을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일련의 법령을 제정하여 상업 활동뿐 아니라 서비스나 일반 주택 건축에 있어 더블 아치형 창문 혹은 트리플 아치형 창문의 규모를 규제하기로 했다. 이는 광장을 둘러싼 건축물의 외관에 통일성을 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푸블리코 궁전(Palazzo Pubblico) 건물은 공동 정부 자리에 동시에 지었다. 이 궁전은 부드럽게 안쪽으로 굽고 총안(銃眼)이 있는 파사드(facade)로 되어 있으며, 고딕 트리플 아치형 창문으로 더욱 강조되었다. 궁전 안에는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의 《마에스타(Maestà)》와 암브로조 로렌체티(Ambrogio Lorenzetti)의 《사악한 정부의 알레고리(Allegoria del Buon Governo)》 등 수많은 중세 시대 회화 명작들이 있다.

토메이(Tomei) 궁전과 부온시뇨레(Buonsignore) 궁전 등 상공인이나 귀족 가족을 위한 고딕 양식 궁전은 폭을 넓히고 벽돌을 사용했다. 이들 건물은 이른바 ‘구엘프(Guelph)’ 크레닐레이션(crenellation, 건물 벽면에 부착하는 요철모양의 흉벽)이라고 불리는 큰 창문이 특징인 푸블리코 궁전을 모델로 삼았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푸블리코 궁전 내에 공공 기관 을 설치하고 나서 광장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 시작되었다. 광장의 바닥을 포장하고, 야코포 델라 퀘르차(Jacopo della Quercia)가 장식한 가이아 분수(Fonte Gaia)를 설치했다. 그리고 궁전의 맞은편에 만자의 탑(Torre del Mangia)과 광장 성당(Cappella della Piazza)을 세웠다. 메디치 하에서의 광장은 멋진 축제를 위한 이상적인 공간이 되었다. 광장에서는 시에나의 각 구역의 팀들이 겨루는 유명한 말달리기 시합인 팔리오(palio)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마을의 가장 높은 지점에는 산타마리아 대성당이 세워져 있다. 성당의 파사드의 아래 부분은 조반니 피사노(Giovanni Pisano)의 작품이며, 조반니 디 체코(Giovanni di Cecco)가 두오모 대성당(Nuovo Duomo)을 지은 후 이 성당을 완성시켰다. 두오모 대성당은 ‘새로운 성당’이라는 뜻으로, 대성당의 거대한 프로젝트는 알프스 북쪽의 고딕 성당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대성당의 훌륭한 바닥은 잘 보존되어 있으며 설교단은 니콜라 피사노(Nicolà Pisano)가 조각한 것이다.

관련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