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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역사 지구 [Historic Centre of Riga]

  • 제목 : 리가 역사 지구
  • 설명 : © UNESCO / Author : Véronique Dauge
리가 역사 지구

상세정보

  • 국가 라트비아(Latvia)
  • 위치 리가 시(City of Riga)
  • 좌표 N56 57 15.012|||E24 7 0.012
  • 등재연도 1997년
  • 등재기준

    기준 (ⅰ)(ⅱ) : 리가 역사 지구는 중세 및 후기의 도시 구조를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으며, 이곳에 있는 아르누보와 유겐트 양식의 건축물들은 세계 어디에도 비견할 바 없이 양적, 질적인 면에서 뛰어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세기의 목조 건축물 또한 매우 훌륭하다.

요약
라트비아 공화국의 수도인 리가(Riga)는 ‘발트 해의 진주’라 일컬어지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다. 리가는 한자 동맹의 중심지로서 13~15세기에 중부 및 동부 유럽과의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 초기의 건물들은 대부분 화재나 전쟁으로 파괴되었지만, 중세의 중심지로서의 도시 구조가 이런 번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19세기에는 중요한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중세의 도시를 둘러싸고 있던 교외 지역이 설계되면서 신고전주의 양식의 목조 건물이 들어서고, 후에는 유겐트 양식(Jugendstil,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이 들어섰다. 일반적으로 리가는 유럽 최고의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이 있는 곳으로 평가된다.
목차
역사적 배경

게르만 정착민들이 석조 건물 기술을 들여와 2개의 성을 지었는데, 하나는 주교를 위해 지은 것이고, 또 하나는 리보니아 전도에 함께 온 독일 기사단을 위한 것이었다. 1210년에 석조 방어벽이 건설되어 해외 교역소를 포함한 기존의 모든 거주지를 둘러쌌다. 상인들의 거센 반대에 주교가 비스비 법을 받아들여 시민들에게 중요한 권리를 부여했다.

고대 도시의 고고 유물은 11세기 후반에 리드제네 강과 다우가바 강의 합류로 형성된 반도에 해외 교역소들과 함께 리브족과 쿠르족의 주거지가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곳은 동양과 서양 간의 무역 교차점이 되었다. 리보니아는 1184년에 게르만인 수도사 마인하르트에 의해서 기독교화되었고, 초기인 1201년에 알베르트 주교에 의해 도시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교와 법령 사이의 갈등, 다른 한편으로는 상인들의 갈등이 지속되었고, 1221년에 주민들은 게르만 지배에 대한 저항운동을 성공시켰다.

13세기와 14세기 초에 리가는 28㏊까지 커졌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3개의 주요 교회 공사와 수많은 공공건물, 상업 건물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1293년에 처음 공포된 규정들은 건축에 목재 사용을 금지하고 북부의 게르만 석조 건축 기법을 들여왔다. 15세기경에 리가는 전형적인 한자 도시로서, 구불구불한 도로에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고, 도시의 중심에는 큰 시장 광장과 강력한 요새 시설이 있었다(1537년부터 신무기와 대포에 대항하여 급진적으로 재건되었다). 16세기 말에는 인구가 10,000명이 넘었다.

시민들에 의해 도시의회가 만들어져 입법부와 행정부를 구성했다. 리가는 독립도시로서 번영을 누리며 발트 해 연안의 뤼베크와 그단스크에 이어 세 번째 상업 도시가 되었다. 1282년에는 뤼베크, 비스뷔와 동맹을 맺어 한자 동맹 도시가 되었다. 리가는 점점 부유해지면서 러시아의 모피, 밀랍, 목재, 타르, 탄산칼륨, 수지, 그리고 가죽을 서양으로 보내고 옷감, 소금, 청어, 포도주, 맥주, 향료를 러시아의 중심부로 들여오는 주요 항구의 역할을 하였다.

15세기에 리가는 전형적인 한자 도시로서 구불구불한 도로에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고, 도시의 중심부에는 큰 시장 광장과 강력한 요새 시설이 들어섰다. 16세기 중반에 리가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종교개혁으로, 리가는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1530년대와 1540년대의 종교개혁 반동을 잘 극복해 냈다. 두 번째, 1559년에 있었던 러시아의 폭군 이반의 무력은 견뎌내지 못했다. 리가는 러시아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어서 폴란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리가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 폴란드 사이에 놓이는 처지가 되었다.

1621년에 리가는 확대된 스웨덴 왕국의 일부가 되었고, 스웨덴과 러시아가 충돌하는 동안 몇 년 간의 전쟁을 겪었다. 리가는 스웨덴 왕국의 최대 도시였다. 1710년에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의 카를 12세가 패배하자 리가는 러시아 군대에 함락되고 9개월 간 포위되어 1918년, 라트비아 공화국이 탄생하기까지 러시아 제국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리가는 제1차 세계대전까지 러시아령으로서 러시아의 중요한 교역 거점이었다.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에서 리가는 발트 3국의 행정 수도가 되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 행정 중심지는 옛 도시에서 성곽 밖에 있는 독일 기사단의 옛 성으로 옮겨졌다. 1769년과 1815년에 다시 교외 지역이 상당히 확장되어 격자형 모양을 갖게 되었다. 이 동안에 리가에의 건축양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는 고전주의가 강조되어 단층 목조 주택 형식으로 표현되었고, 특히 새로 생긴 교외 지역뿐만 아니라 옛 도시의 이전 건물들도 교체되었다.

18세기 중반, 러시아의 지배로 잠시 경제적 침체기가 이어졌으나 18세기 말에 해외 무역이 호황을 누리면서 상당한 산업이 상당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인구도 증가하여 1857년에 60,000여 명이던 인구는 몇 년 후 300,000명이 넘었다. 리가는 러시아 제국에서 다섯 번째(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키예프, 바르샤바 다음으로) 큰 도시이자 가장 큰 항구였으며, 그곳의 공장들은 러시아 제국 총생산의 5.7%를 담당하였다.

이렇게 새로 번창하게 되면서 도시의 구조에 대해서도 새롭게 접근하게 되었다. 1857년에 요새를 더 높이고, 도시 재건을 위한 새로운 계획이 1857년~1863년에 걸쳐 시행되었다. 그 결과, 도시의 전체적인 공간 구조와 건축 구조가 바뀌었다. 성벽이 있던 자리는 녹지대로 바뀌었고, 그 바깥으로는 새로운 반원형 대로가 놓였다. 이 대로를 넘어 개발된 신도시에 많은 공공건물, 극장, 학교, 대학, 중앙우체국, 철도역이 들어섰다.

이전에는 건물에 석재 사용을 금지했던 법령이 폐지되어 리가의 부유층들이 그들의 부를 이용해 확장된 교외 지역에 개인 주택단지를 지었다. 라트비아와 러시아의 건축가들은 유럽의 양식, 특히 핀란드에서 들어온 아르누보 양식을 열렬히 차용했다. 이렇게 해서 리가의 특색이 생겨났는데, 이는 리가 기술전문학교 졸업생들에 의해 국가적 양식이 되었다.

라트비아 공화국의 첫 20년 동안 리가의 건축 기법을 지배한 것은 기능주의였으며, 이것은 건축 양식을 더 다양하게 만들었다. 중세의 옛 도시를 현대화하는 계획의 일환으로 수많은 단지들을 온전하게 재건하고 도로를 확장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갑자기 중단되었다. 전쟁 중에 옛 도시는 폭격으로 심한 피해를 입었으나, 성 베드로 교회와 같은 매우 중요한 기념물과 중세의 가옥 몇 채는 복구되었다.

유산면적
438㏊
완충지역
1,574㏊
참고번호
852
본문

리가 역사 지구는 중세 및 후기의 도시 구조를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으며, 이곳에 있는 아르누보 혹은 유겐트 양식의 건축물은 세계 어느 곳과도 비견할 바 없이 양적, 질적인 면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세기 목조 건축물 또한 매우 훌륭하다.

고대 도시의 고고 유물은 11세기 후반에 리드제네(Ridzene) 강과 다우가바(Daugava) 강의 합류로 형성된 반도에 해외 교역소들과 함께 리브족(Livs)과 쿠르족(Cours)의 주거지가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곳은 동양과 서양 간의 무역 교차점이 되었다. 리보니아는 1184년에 게르만인 수도사 마인하르트(Meinhard)에 의해서 기독교화되었고, 초기인 1201년에 알베르트(Albert) 주교에 의해 도시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교와 법령 사이의 갈등, 다른 한편으로는 상인들의 갈등이 지속되었고, 1221년에 주민들은 게르만 지배에 대한 저항운동을 성공시켰다.

시민들은 도시의회를 만들고 입법부와 행정부를 구성했다. 리가는 독립도시로서 번영을 누리며 발트 해 연안의 뤼베크(Lübeck)와 그단스크(Gdańsk)에 이어 세 번째 상업 도시가 되었다. 1282년에는 뤼베크, 비스뷔(Visby)와 동맹을 맺어 한자 동맹 도시가 되었다. 15세기경에 리가는 전형적인 한자 도시로서, 구불구불한 도로에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고, 도시의 중심에는 큰 시장 광장과 강력한 요새 시설이 있었다.

16세기 중반에 리가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종교개혁으로, 리가는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1530년대와 1540년대의 종교개혁 반동을 잘 극복해 냈다. 두 번째, 1559년에 있었던 러시아의 폭군 이반의 무력은 견뎌내지 못했다. 리가는 러시아에게 점령되었고, 이어서 폴란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리가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 폴란드 사이에 놓이는 처지가 되었다.

1621년에 리가는 확대된 스웨덴 왕국의 일부가 되었고, 스웨덴과 러시아가 충돌하는 동안 몇 년 간의 전쟁을 겪었다. 리가는 스웨덴 왕국의 최대 도시였다. 1710년에 폴타바 전투(Battle of Poltava)에서 스웨덴의 카를 12세가 패배하자 리가는 러시아 군대에 함락되고 9개월 간 포위되어 1918년, 라트비아 공화국이 탄생하기까지 러시아 제국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도시의 초기 구조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단순한 목조 건물이 반도의 끝에 있는 항구 주변에 모여 있고, 거리는 통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방어벽은 없었던 것 같다.

리가 역사 지구는 중세의 옛 도시, 19세기의 반원형 도로, 대로 외곽에 있는 18, 19세기의 바둑판 형태 교외 지역의 3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중세의 가옥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데, 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삼형제의 집(House of the Three Brothers)’으로, 15세기부터 완벽하게 복원되었다. 17세기 후반의 레우템(Reutem)의 집과 담스템(Dammnstem)의 집이 더욱 기념적인 건물로서, 인상적인 외관은 물론 내부 장식과 부속물들이 주목할 만하다. 도시의 성곽은 19세기 중반에 해체되었으나 일부는 보루로 바뀌어 재건되었다.

대로에는 국립극장과 라트비아 미술관을 비롯한 19, 20세기의 중요한 건물이 많다. 대로는 유럽에서 절충주의 유행과 때를 같이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런 양식이 풍부하게 표현되어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급속하게 확장되고 발전된 교외 지역은 러시아 양식의 고전적인 목재 건물이 남아 있고, 요새를 없애고 나서 신도시 건설 계획을 실행하면서, 특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생겨난 건물이 유난히 많다는 것이 주목된다. 건축가들은 절충주의 양식에 따라 화려한 모습을 많이 만들어 냈는데, 마이스타루(Meistaru) 거리에 있는 ‘고양이의 집(House of the Cat)’이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핀란드를 거쳐 리가에 들어와 교외 지역에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들을 만들어 낸 것은 아르누보 양식이었다. 그 예가 셀 수 없이 많은데, 그중에서 아마 가장 탁월한 것이 알베르타 거리와 엘리자베스 거리에 있는 마카일 아이젠스타인(Mikhail Eisenstein)의 작품들일 것이다. 낭만주의가 라트비아에서는 핀란드를 본떠 유겐트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이 운동은 라우베(E. Laube)와 바나그스(A. Vanags)와 같은 건축가들의 작품에 반영되어 있고, 그들의 멋진 작품이 알베르타(Alberta) 거리와 브리비바스(Brivibas) 거리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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