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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찬 고고 유적 지대 [Chan Chan Archaeological Zone]

  • 찬찬 고고 유적 지대
  • 제목 : 찬찬 고고 유적 지대
  • 설명 : © UNESCO / Author : Jim Williams
찬찬 고고 유적 지대

상세정보

  • 국가 페루(Peru)
  • 위치 우안차코 지구(District of Huanchaco)
  • 좌표 S8 5 60|||W79 4 59.988
  • 등재연도 1986년(1986년 위험에 처한 세계문화 유산 등재)
  • 등재기준

    기준 (ⅰ) :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에 흙으로 만든 가장 큰 도시를 계획한 것은 분명 도시계획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엄격한 구역 구분과 거주 공간의 차별화, 계층적인 구조는 정치적·사회적 이상을 나타내며, 이상이 이처럼 분명하게 표현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기준 (ⅲ) : 찬찬은 사라진 치무왕국의 가장 대표적인 도시로서 1,100년간 페루 북부에 나타난 문화적 진화를 종합적으로 보여 준다. 건축물의 조화를 통해, 상징적이고 신성한 건축물을 공업 기술과 독특하게 통합하여 현지 환경에 맞게 적용했다.

요약
15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잉카 제국에게 점령된 치무(Chimu) 왕국의 수도였던 찬찬(Chan Chan)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이 도시가 독립적인 단위인 9개의 ‘요새’와 ‘궁전’으로 나뉜 것으로 보아 엄격한 정치적·사회적 전략으로 도시가 계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차
탁월한 보편적 가치

치무 왕국은 15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잉카 제국에게 점령되었다. 한때 비옥했던 모체(Moche), 산타카탈리나(Santa Catalina)의 강 유역에 있는 치무 왕국의 수도 찬찬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흙으로 건축된 가장 큰 도시였다. 도시를 독립적인 단위인 9개의 ‘요새’ 와 ‘궁전’으로 나눈 것으로 볼 때 엄격한 정치적·사회적 전략에 따라 배치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찬찬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도시를 유지하던 산업과 농업, 용수 관리 체계를 포함하여 이 유적지가 대규모 및 계층적으로 계획된 도시였다는 점이다. 20㎢ 넓이의 도시 중심부에는 약 6㎢의 대구역이 있으며, 이 구역은 두껍고 높은 흙벽으로 장식된 9개의 커다란 직사각형 단지(‘요새’ 또는 ‘궁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신전과 주거지, 저장소와 같은 건물은 저수지, 장례 시설과 함께 야외 공간 주변에 배치되어 있다.

건물의 흙벽은 대부분 추상적인 무늬와 사람 형태, 동물 모양의 프리즈(frieze)로 장식되어 있다. 이 9개의 단지 주변에는 32개의 중간 구역과 목공, 금속 가공 활동을 위한 4개의 제조 구역이 있었다. 더 멀리 떨어진 도시의 북쪽과 동쪽, 서쪽에서는 광대한 농지와 관개시설이 발견되었다. 약 80㎞ 길이의 수로를 통해 모체 강과 치카마(Chicama) 강으로부터 복잡한 관개 시설로 물을 공급했으며, 이로 인해 치무 문명의 절정기에 찬찬 주변 지역을 지킬 수 있었다.

완전성

찬찬은 14㎢의 구역에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비록 도시의 원래 면적보다 작지만, 이 구역 안에 유산의 중요성을 반영하는 건축, 의식, 신전, 농업과 같은 대표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건축물의 재료가 흙인데다 엘니뇨(El Niño) 현상과 같은 극단적인 환경 조건 때문에 이 유적지는 붕괴와 파괴에 취약하다. 흙을 이용하여 보수할 경우 물리적인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다.

불법 농경은 이 유산의 배경과 시각적인 완전성에 악영향을 끼쳤으며, 보류 중인 토지 소유 문제와 이전 문제로 인해 완전성이 더욱 악화되었다. 최근에는 동물성 식품 공장과 식민지 시대 이후 찬찬을 둘로 분리한 트루히요·우안차코(Trujillo-Huanchaco) 고속도로를 포함하여 도시화와 인프라 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상황이 더욱 나빠지고 있다.

진정성

이 유산의 형태와 디자인은 예전 치무 왕국의 수도에서 볼 수 있었던 기념비적인 도시 전경을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9∼15세기 치무 사회의 정치적·사회적·기술적·이념적·경제적 복합성이 반영된 계층적인 배치 형태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종교적인 특색과 장식을 갖추었던 원래의 흙 건축물은 부식되었지만, 최근에 흙 재료를 사용하여 보수하고 있으며, 여전히 치무 인의 건축 방법과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보존 및 관리 체계

페루의 문화부(MC)는 라리베르타드(La Libertad) 주에 있는 지방분권사무소를 통해 찬찬을 보존하고 보호한다. 문화부는 국가, 지역, 자치 정부와 협력하여 유산의 보호 조치, 특히 유산의 불법 점유에 관한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이 유산은 국가법령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유산의 장기 보존과 완전한 보호를 위해 실시되어야 하는 토지 소유, 불법 거주자 이전, 불법 농사 행위 금지, 규제 조치 집행 등과 같은 문제들은 아직 효과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완충지역에 대한 규제 조치는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하여 수립하고 있다.

이 유산은 흙으로 지어진 건축물의 보존 상태가 불안정했으며 엘니뇨 현상 등의 기후 변화에 취약했기 때문에 1986년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포함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고유적에서 나타나는 고질적인 도굴 문제와 이 유적을 가로지르는 도로 건설 계획 등도 위협 요소가 되고 있다.

등재 이후, 이 유산을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서 제외시키기 위해 시정조치 이행과 관리계획 등 보존 상태를 개선하려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그리고 1999년 이후에는 유산의 지하수면 상승에 따른 위협을 처리하기 위해 구제 조치가 시행되었다.

관리 계획은 2000년에 10개년 계획으로 승인되었다. 새로운 조건이 발생하고 조치가 완수되면 이 계획도 갱신되어야 할 것이다. 실행 계획은 주로 지하수면 수위를 관리하는 배수 관리와 궁전 및 장례시설의 주위 벽 안정화, 초목 관리, 공공용지 유지, 보존과 관리를 위한 건축 자료 문서화, 현지 장인의 능력 배양, 학생과 현지 공동체 대상의 인식 제고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엘니뇨 현상에 대비하는 비상 재난 대책 계획도 개발했다.

조치가 연속해서 완성됨에 따라 ‘작업단 110(Implementing Unit 110)’ 창설과 관리계획 이행을 위한 자금의 지속적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유산이 갖고 있는 난제를 해결하려면, 적절한 참여관리 체계를 모두 가동하고 보존과 보호, 공공 사용 관리 조치를 지속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재정 자원과 인적 자원을 적절히 배분해야 한다. 유산의 사회적, 자연적 위험을 동시에 다루려면 효율적인 위험 관리 계획도 세워야 한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페루의 문화적 상징으로 유적을 보존하면서 지역과 국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찬찬의 미래 비전이다. 고고 유적지를 보호하고 공개하면 유산의 가치와 페루의 문화적 정체성이 더 강화될 것이다.

유산면적
600㏊
참고번호
366
본문

찬찬 계획도시는 스페인 정복 이전의 가장 큰 도시이자 사라진 치무 왕국의 유일한 증거이며, 거주지의 모습은 뛰어난 걸작이다. 그리고 도시의 계층적인 구조는 정치적·사회적 이상을 반영한 것으로, 이상이 이렇게 분명하게 표현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치무 왕국은 15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잉카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긴 전쟁을 겪은 후, 1470년 무렵 잉카의 투팍 유판키(Tupac Yupanqui) 왕은 민찬카만(Minchancaman) 왕을 쿠스코(Cuzco)의 포로로 잡았다. 왕의 아들인 추문 카우르(Chumun Caur)가 북쪽 왕국을 다스렸으며, 이후에는 잉카로 인해 분열되었다. 약 60년 후, 잉카 인들에게 증오심을 가졌던 치무족은 스페인 정복자들을 환영했으며, 찬찬에서 5㎞ 떨어진 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1535년에 피사로(Pizarro)의 고향 이름을 따서 ‘트루히요’라고 하였다. 그리고 찬찬이 있던 곳은 버려졌다.

1200년 무렵 치무 문명에 대한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바로 이곳에 4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모치카(Mochica)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북쪽 과야킬(Guayaquíl) 만에서 남쪽 건조 지대까지 복잡한 관개 시설을 지었으며, 80㎞의 수로를 통해 흐르는 강물을 이용하여 찬찬 인근 지역에 물을 공급했다. 그러나 더 이상 치무 문명의 절정기를 풍미했던 이 지역의 풍요로움을 상상하기 어려워졌다.

과거에는 스페인의 보물 사냥꾼이 찬찬 유적지를 약탈했으며, 현재에도 국가 차원의 유산보호 법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굴꾼’들의 약탈이 계속되고 있다. 스파니아르드 발타사르 마르티네스 데 콤파뇬(Spaniard Baltazar Martinez de Compañon)은 1755년∼1785년에 유적의 단순 도면을 작성했다. 그리고 1969년부터는 마이클 E. 모즐리(Michael E. Moseley)가 주도한 하버드대학 발굴사업을 통해 조사가 실시되었지만 유적의 지도는 불완전했다.

이곳의 고고학 탐사는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취약한 건축 자재인 어도비 벽돌(햇볕에 말려서 굳힌 벽돌)이 급속하게 부식되는 것을 막을 수 없어, 이 유적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아울러 과거에 발굴되어 조사가 이루어진 구조물은 대부분 완전히 사라졌다.

관광객들은 찬찬의 규모 자체와 계층적인 도시 공간이 엄격하게 체계화되어 있다는 점에 놀란다. 전체 면적 6㎢ 미만인 이 도시는 큰 직사각형의 9개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구역은 두껍고 높은 흙 담으로 구분된 ‘요새’ 또는 ‘궁전’들이다. 이 각각의 ‘궁전’은 독자적인 도시 단위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러한 도시 단위는 하나 이상의 광장 주변을 중심으로 몇 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광장은 경우에 따라 의식적인 성격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에는 신전과 주거지, 저장소, 주방, 저수지, 과수원, 정원, 장례 시설, 공동묘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추상적인 무늬와 사람 형상, 동물 모양의 프리즈로 장식된 거친 벽은 늘어서 있는 커다란 유적에 이례적으로 화려함을 부여한다. 이 9개의 직사각형 구역 밖에는 서쪽과 남쪽으로 네 군데의 산업구역이 있다. 이곳에서 이루어진 주요 활동은 목공과 직물 직조, 금은 세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 남쪽 지역은 관개 시설의 유적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농지로 이용된 것 같지만, 신전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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