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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롱의 제국주의 시대 성채 중앙 구역 – 하노이 [Central Sector of the Imperial Citadel of Thang Long – Hanoi]

사진 없음 표시 이미지 탕롱의 제국주의 시대 성채 중앙 구역 – 하노이

상세정보

  • 국가 베트남(Viet Nam)
  • 위치
  • 좌표 N21 2 22|||E105 50 14
  • 등재연도 2010년
  • 등재기준

    기준 (ⅱ) : 탕롱의 제국주의 시대 성채 중앙 구역 – 하노이는 북쪽으로는 중국의 문화와 남쪽으로는 고대 참파 왕국의 문화가 만나서 교류하였음을 증명하는 곳이다. 홍강 계곡의 하류는 문화가 만나 상호 교류하며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음을 표현하고 있다.

    기준 (ⅲ) : 탕롱의 제국주의 시대 성채 중앙 구역 – 하노이는 홍강 계곡 하류의 삼각주에서 베트남 사람들이 발달시킨 유서 깊은 문화 전통을 보여 준다. 이곳은 7세기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 지역의 정치적 중심지였다.

    기준 (vi) : 탕롱의 제국주의 시대 성채 중앙 구역 – 하노이는 정치적인 기능과 상징적인 역할을 담당해왔으며 여러 가지 다양하고 중요한 문화적·역사적 사건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이곳은 예술적 표현, 도덕, 철학, 종교적 사상을 주도하여 왔다. 식민지시대와 두 차례에 걸친 현대의 독립전쟁, 베트남의 통일을 포함한 일련의 사건들은 천 년이 넘도록 이어온 독립국가의 형성 및 발달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요약
탕롱(Thang Long) 제국주의 시대 성채는 다이비엣(Đại Việt, 大越, 베트남 국호의 하나)의 독립을 기념하여 11세기에 리 비엣 왕조(Ly Viet Dynasty)가 하노이의 홍강(紅江, Red River) 삼각주를 개간한 땅에 건축되었다. 이 삼각주는 7세기에 세운 중국의 요새가 남아 있던 유적지였다.

탕롱의 성채는 거의 13세기 동안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이 지역의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성채 건물과 ‘호앙 지에우(Hoang Diêu) 18 고고학유적지’는 북쪽의 중국과 남쪽의 고대 참파 왕국(Kingdom of Champa)의 영향이 만나는 홍강 계곡 하류에서 발달한 독특한 동남아시아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목차
탁월한 보편적 가치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이곳은 옛 탕롱 제국주의 시대 성채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한가운데에 있으며 또한 가장 잘 보존된 구역이다. 탕롱의 성채는 다이비엣(大越, Đại Việt)의 독립을 기념하여 11세기에 리 비엣 왕조가 건설하였다. 이 성채는 하노이의 홍강 삼각주를 개간하여 물을 배수한 땅 위에 건축되었는데, 이곳은 본래 7세기에 건축된 중국의 요새가 남아 있던 유적지였다

탕롱의 성채는 거의 13세기 동안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이 지역의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성채 건물과 ‘호앙지에우 18 고고학유적지’는 북쪽으로는 중국의 영향과 남쪽으로는 고대 참파 왕국의 영향이 홍강 계곡 하류에서 만나 발달한 독특한 동남아시아의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제국시대의 탕롱 성채는 권좌로서의 지속성과 연속성을 반영하는 것이 특징이며, 이 사실은 여러 고고학적 기념물과 그 수준으로 입증되고 있다.

완전성

탕롱의 장구한 역사 속에 이어온 정치적 역할은 고고학적 요소와 탕롱 성채의 구성 요소들 중 후대에 건설된 요소로 증명되고 있다. 때때로 증거가 소실되어 언제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건축물의 구조·유산의 주변 경관 등을 통해 유산의 완전성을 인정할 만하다. 고고학적 흔적 중 ‘호앙지에우 18 고고학유적지’에 대한 연구 프로그램은 고고학적 완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진정성

탕롱의 건축물로 표현된 진정성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의 건물들에서 찾을 수 있다. 왕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건물, 특히 도안몬 문(端門, Doan Mon Gate)과 하우라우 궁(後樓宮, HauLau Palace)은 훗날 복원되거나 변경되었다. 이러한 건축물의 변화는 유산의 정치적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유서 깊은 탕롱 성채는, 비록 제한적인 구역에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이를 통해 드러난 것만 보아도 고고학적 진정성이 높다. 건축물의 완전성 정도는 각 건축물의 건립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현대에 해당하는 식민지 시대의 건물이 더욱 만족스럽다.

보존 및 관리 체계

유산의 법적 보호는 기본적으로 다음 두 법률에 토대를 두고 있다. 첫째, 유산에 포함된 다양한 인지 가능한 동산 및 부동산을 보호하는 문화유산법(2001), 둘째, 모든 공사 및 프로젝트에 적용되는 건축법이다. 등재된 유산의 영역 안에서 시행 예정인 프로젝트와 같이 두 법률의 적용에 충돌할 경우, 유산관리법이 우선 적용된다. 유산에 대한 현재의 법적 보호가 적합하지만 보완이 필요하고, 더 넓은 완충지대를 설정하여야 한다. 관리 계획에서 정한 일반적인 지침은 만족할 만한 수준이나 이 계획은 법으로 제정되어야 하고, 고고학 연구 요소가 강화되고 확대되어야 한다. 아울러 유산의 보존에 관여하는 담당자들의 능력 함양이 강화되어야 한다.

유산면적
18㏊
완충지역
108㏊
참고번호
1328
본문

오늘날의 베트남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베트 인(Viet) 또는 킨 인(Kinh)은 자신들을 세상이 창조되었을 때부터 존재한 민족으로 간주하며 그들만의 우주 생성론을 가지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제국의 창설은 기원전 제3천년기에 15명의 왕과 왕비가 모여 최초의 남베트(Nam Viet, 베트 남부의 땅) 황제를 선출할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6세기 오늘날 관둥(關東, Guandong)과 북베트남에 걸쳐 있는 곳에 반랑(Van Lang)이라는 독립 왕궁이 세워졌다. 초기 역사 기록에는 인간이 홍강 삼각주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211년이라고 한다. 물을 잘 이용했던 이 농경사회는 북쪽의 중국에서 전해진 문화적 영향과 동남아시아와 남부아시아의 문명이 만나는 홍강 삼각주에서 발달되었다.

중국 한나라의 세력하에 있던 베트남 왕국은 마침내 기원전 111년에 한나라에 정복되어 홍강 계곡의 하류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그 후 베트남은 중국 한나라 남부 국경지대의 여러 왕국 중 하나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후 약 1,000년 동안 중국의 정치적·문화적 지배를 받았다. 베트남 역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이 시대의 마지막을 다이라(大羅, Dai La) 시기라고 부른다. 하노이 지역에 중국식 성채가 처음 세워진 것이 이 시기였으며, 7~10세기에 지은 성벽과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10세기 베트남 자치 왕조(Dinh-Le)가 홍강 계곡 하류에 독립 왕국 다이비엣을 건국함으로써 중국의 지배는 끝났다. 11세기 초 리 비엣 왕조는 중국의 옛 성채가 서 있던 자리에 새로운 성채 탕롱을 건설하여 국가의 독립성을 보여 주었다. 1029년 벽돌로 건축된 ‘금단의 도시(Forbidden City)’를 확장하며 에워싸서 방어벽을 형성했다. 권력과 왕실 거주지였던 탕롱 성채에는 중국식 건물 배치가 선택되었다. 그것은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에서만 적용되는 풍수학 이론을 따른 것이다.

제1천년기 말기에 다이비엣 왕국이 스스로의 존재를 주장한 것과 같은 시대에 인도양을 통해 건너온 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현대 베트남의 중부와 남부 지방에서 참파 왕국을 건설하였다. 참파 왕국은 당시 매우 강력하고 급속하게 확장하고 있던 크메르 왕국과 교류하였다. 이러한 교류는 인도와 남부 아시아로부터 전해진 문화, 특히 불교가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성채 지역에 해당하는 홍강 하류 지역 역사의 큰 특징은 베트남 사람들과 여러 중국 왕조 가 서로 끊임없는 교류하여 상호작용을 했던 점이다. 특히 참파 왕국과 남부 지역 사이의 상호 작용은 유교와 도교의 전통, 불교 전통의 교류를 통해 독특한 문명이 만들어졌다. 또한 이들에게는 훌륭한 농경문명이 있었는데 배수와 제방, 농업용 수력학에 상당한 전문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불교문화는 리 비엣 왕조(1010~1225)와 쩐(陳, Tran) 왕조(1225~1400) 시대에 전파되었고, 제도의 발달과 사회, 종교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이비엣 왕국은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며 영토를 넓혀나갔다. 그러나 다시 레(黎, Le, 1428~1789) 왕조로 바뀌면서 유교적인 가치로 되돌아갔고, 특히 15세기에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하노이는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였다. ‘금단의 도시’ 심장부에 건설된 킨티엔 궁(Kinh Thien Palace)은 베트남 문화 자체의 건축 문화와 도시 계획에 정점을 찍은 것이었다. 탕롱 성채의 규모는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최대에 이르렀고, 성채에는 이곳에 종사한 공인·상인들 구역도 발달하였다. ‘금단의 도시’는 왕실의 의례적 장소일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치적·행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참파 왕국의 남부 지역 정복 시기여서 레 왕조는 명실상부한 황제의 면모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부터 정치적 변화가 조금씩 시작되었다. 황제의 역할은 점점 상징적으로 바뀌었고, 북쪽의 찡(鄭, Trinh) 가문과 남쪽의 응우옌(阮, Nguyen) 가문이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초기에 응우옌 가문의 세력이 커지더니 마침내 후에(Hué)에 새 수도를 건설하고 새 왕조를 창설하였다. 탕롱은 이제 황제가 이 지역을 순행할 때 거처로 이용되었다. 그때 이용했던 북쪽 성채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 성채는 보방(Vauban, 프랑스 건축가)의 유럽식 모델에 기초하여 1805년에 다시 건설했다.

1860년대부터 프랑스의 식민지 군대가 근대 베트남 남부 지역에 주둔하였다. 그들은 1880년대에 북부 지역을 정복하였다. 탕롱은 다시 한 번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탕롱은 근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로 이루어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거대한 식민지 권력의 총본부 역할을 하였다. ‘금단의 도시’의 심장부 킨티엔 궁을 비롯한 많은 궁전이 유럽 양식, 일반적으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1886년에 다시 건설되었다. 19세기 말 총독의 관저(현재 완충지역 내)가 건설되었고, 고대 성채 주변과 그 내부에 유럽 양식의 도시 개발을 위하여 요새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1954년 제1차 독립전쟁과 베트남의 분단 이후 베트민(Viet Min)의 정치권력은 하노이에 둥지를 틀었고, ‘금단의 도시’는 북베트남의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남베트남과 미국이 싸운 제2차 전쟁 중 1967년에는 킨티엔 궁의 경내에 D67 사령부 지하 벙커를 설치하였다.

국방부는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이 유산의 이용을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면서 문화·역사적 용도로 바꾸었다. 2002년 ‘호앙 지에우 18 고고학유적지’는 놀라운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애초에 국회의사당 건설 부지였던 곳이었으나 발굴로 인해 의사당 부지 규모는 많이 축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