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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벨리어 국립공원 [Þingvellir National Park]

  • 싱벨리어 국립공원
  • 제목 : 싱벨리어 국립공원
  • 설명 : © UNESCO / Author : Francesco Bandarin
싱벨리어 국립공원

상세정보

  • 국가 아이슬란드(Iceland)
  • 위치 아르네시슬라 지구(district of Arnessysla)|||블라스코가비교(Bláskógabyggð municipality)
  • 좌표 N64 15 13.7|||W21 2 14.1
  • 등재연도 2004년
  • 등재기준

    기준 (ⅲ) : 싱벨리어 국립공원의 의회와 배후지는 의회 부지와 참석자들을 위한 부스의 유적과, 의회 설립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 정착지의 풍경을 통해 중세 스칸디나비아-게르만 문화가 잘 반영되었음을 보여 준다.

    기준 (ⅵ) : 중세 스칸디나비아-게르만 통치와 알싱 사이의 강한 관련성에 대한 자부심은 12세기 아이슬란드의 전설을 통해 알려졌으며, 19세기 독립 투쟁 기간에 강화되었다. 이곳은 회합 장소로서 웅장한 자연환경과 더불어 아이슬란드 국민의 성지와 같은 상징적인 지위를 가진 장소이다.

요약
아이슬란드 전체를 상징하는 야외 의회인 알싱(Althing)이 930년~1798년까지 계속해서 개최된 장소가 있는 국립공원이다. 매년 2주 남짓 동안 열리는 의회에서는 자유인 사이의 계약인 법을 검토하고 분쟁을 해결했다. 알싱은 아이슬란드 인들에게 깊은 역사적·상징적 연관관계가 있다. 유산은 싱벨리어 국립공원과 알싱 유적 자체를 포함하며, 잔디와 돌로 건축된 50개의 부스 유적과 주변 흔적들이 남아 있다. 10세기 이래의 유물들은 지하에 매장된 것으로 추측된다. 유적지는 또한 18, 19세기부터 농업 유적도 포함한다. 싱벨리어 국립공원은 1,000년이 넘도록 보존해 온 뚜렷한 경관을 보여 준다.
목차
역사적 배경

아이슬란드는 스칸디나비아·영국·아일랜드에서 서쪽 방향으로 거대한 집단 이주가 있었던 9세기경, 북유럽 사람들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870년경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930년경 아이슬란드는 식민지화되어, 870년∼930년은 ‘식민지 시대’로 알려져 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북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은 페로 제도(Faeroe Is)와 그뢴란트(Groenland)에 도착했다. 이 세 곳에서 게르만 전통에 따라 자유롭고 준비된 사람들로 구성된 의회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인구가 많은 국가들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는 전쟁을 이끌 수 있는 왕 또는 국가 지도자를 두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이 섬들이 전략적으로 방호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아이슬란드 의회 혹은 총회가 처음에는 1년에 2주간 계속되었으며, 게르만족 사회처럼 노천에서 열렸다. 그곳에서 법률을 정하고 보존하고 법으로 인해 야기된 분쟁을 처리했다. 법률은 자유인들의 동의이며, 일종의 사회적 협약이었다. 법률은 1117년과 1118년에 문서로 기록되었으며, 12세기에는 수사본(手寫本) 형태로 보존되었다. 이 초기 사회 코먼웰스(Commonwealth)는 국가의 주요 수뇌부들이 모이는 자유로운 협회였으며 중앙집권적 권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통치 기관들은 국민의 권리를 명확하게 규명하였으나 그것을 집행할 권한은 없었다. 12세기∼13세기에 기록된 아이슬란드인의 『사가(Saga)』(‘영웅담’이라는 뜻)는 상호 동의에 따라 수세대에 걸쳐 정리된 법률과 자연적으로 제한되는 권력 등 법률과 권력에 관한 그들의 이상을 칭송하였다.

13세기 초, 가장 영향력이 있는 국가 지도자들 간에 갈등이 생기면서 행정 구조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노르웨이와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집단 이주가 이루어지던 이 시기에 이 국가들의 왕권은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3세기가 지나면서 왕권은 상당한 효력을 발생할 정도로 커졌으며, 그 결과 13세기에 한 국가의 권력은 강한 군주의 통제와 같은 뜻이 되었다. 1262년∼1264년에 아이슬란드 지도자들은 독립을 유지하면서도 노르웨이 군주제에 동조했다. 1262년과 1319년에 왕과 그의 주요 공직자들에게 법률의 집행권을 주고, 왕이 입법 회의를 지명하는 행정 구조를 도입했다. 그렇지만 왕은 법률 제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1662년, ‘전제주의’, 다시 말해 군주의 절대적 권력이 아이슬란드에 도입됨으로써 입법 회의의 역할이 상당히 감소되었으나, 1700년까지 몇몇 분야에서만 법률을 가결시키는 역할은 유지되었다. 그 이후 50년 동안 아이슬란드 의회의 입법권은 결국 사라지고, 18세기 말경 의회 모임은 오래전 모임에 대한 어렴풋한 흔적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1789년에 큰 지진이 일어난 후, 아이슬란드 의회는 레이캬비크(Reykjavik)로 이전되어 1800년 의회가 폐지될 때까지 그곳에서 회의를 개최하였다. 중세 스칸디나비아의 초기 영웅담에서 표현된 코먼웰스의 이상은 19세기에 자유로운 최상의 아이슬란드를 위해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들의 테마를 따르던 시인들과 작가들은 싱벨리어를 아이슬란드 국가의 영혼과 정신이 깃든 장소로 보았다. 또한 예술가들은 풍경뿐만 아니라 그들과 관련된 고귀한 사법 시스템을 다시 환기함으로써 영감을 얻었다. 풍경의 정신적 가치를 높게 의식하는 민족주의적인 자각은 유럽에서 일어난 유사한 새로운 경향과 동시에 발생하였다. 아이슬란드 『사가』는 여러 유럽국가에 번역되어 인기를 얻었다. 아이슬란드는 북유럽 문화를 대표하는 곳으로 간주되었고, 싱벨리어에는 순례를 위해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였다. 1930년, 의회가 수립된 지 1,000년이 되었다는 명성에 부합하고자, 아이슬란드 정부는 공식적으로 유럽 최고 국립공원들 중 하나로 싱벨리어를 지정하면서 그 중요성을 인정했다.

유산면적
9,270㏊
참고번호
1152
본문

알싱과 배후지를 비롯한 싱벨리어 국립공원은 의회 참석자들을 위한 부스 유적과 의회 부지의 유적을 통해, 의회 설립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 정착지의 풍경을 통해, 980년~18세기에 이르기까지 고유하게 지속·반영해온 중세 스칸디나비아-게르만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중세 스칸디나비아-게르만 통치와 알싱 사이의 강한 관련성에 대한 자부심은 12세기 아이슬란드의 전설을 통해 알려졌으며, 19세기 독립 투쟁 기간에 강화되었다. 이곳은 회합 장소로서 웅장한 자연환경과 더불어 아이슬란드 국민의 성지와 같은 상징적인 지위를 가진 장소이다.

싱벨리어 국립공원에는 930년에 설립되어 1798년까지 회합이 계속되었던 아이슬란드를 대표하는 야외 의회가 남아 있다. 의회는 매년 2주 남짓 동안 자유인 사이의 계약인 법을 검토하고 분쟁을 해결했다. 알싱은 아이슬란드 인들에게 깊은 역사적·상징적 연관관계가 있다.

현재 활화산 지대에 속하는 세계 유산은 싱벨리어 국립공원과 알싱 유적 자체를 포함하며, 잔디와 돌로 건축된 50개의 부스 유적과 주변 흔적들이 남아 있다. 10세기 이래의 유물들은 지하에 매장된 것으로 추측된다. 유적지는 또한 싱벨리어 교회, 인접한 농장, 싱그발라바튼(Thingvallavatn) 호수의 북극 곤들매기들과 같은 18세기, 19세기부터 이용해온 농업 유적도 포함한다. 싱벨리어 국립공원은 1,000년이 넘도록 경관을 잘 보존해 온 뚜렷한 증거를 보여 준다.

의회는 몇몇 부속 기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법 자문위원회, 5개의 법원, 법률 중재자 등이 그것이다. 법 자문위원회의 주요 업무는 법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있다. 12세기 역사 연대기 『아이슬란드 인의 책(Islendingabók)』에는 섬을 가로질러 가기 편리한, 의회 장소로 어울릴 만한 곳을 찾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선택된 장소가 섬의 남쪽이었지만 농업인구가 가장 집중한 곳으로 적당한 장소로 여겼다.

싱벨리어의 유적에는 약 50개의 부서진 참석자 부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천막으로 덮인 지붕과 잔디와 돌로 건축되었던 이 부스는 의회의 참석자들을 위한 임시 거처로 사용되었다. 이런 부스는 자주 수리되었거나 혹은 동일한 장소에 재건축되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부스는 의회의 마지막 번영기인 17세기, 18세기에 지은 것과 초기의 유적 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의회의 배후지는 섬의 번영과 관련 있는 농업용 토지에 자리 잡았다.

현재 국립공원에는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다. 이 공원을 조성할 당시 이 지역에서 3개의 농장이 있었으며 이 농장은 인수되었고 주거지와 건물은 점차 상실되었다. 마지막 거주자는 1960년대에 떠났다. 공원경관에는 농작물과 건초를 둘 작은 거주 영역, 헛간, 양 우리 등 초기 농경지와 연관된 구조물들의 풍부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런 곳들은 각각의 농장들과 그들이 집중하여 모일 회합장소는 네트워크 식의 길로 연결되도록 되어 있다.

넓게 탁 트인 땅에 농장의 양과 소, 의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말을 위한 방목지가 자리하였다. 여름 농장 또는 여름 방목장, 예배당과 양조장 등으로 이루어진 6개의 농장 유물이 남아 있다. 그림스타디르(Grimsstadir) 농장 같은 특정 정착지는 문서 기록에 따르면 1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유물들은 대부분 18세기, 19세기 것들로 짐작된다. 1850년대부터 보호 건축물이 된 오늘날의 싱벨리어 교회는 11세기 초에는 훨씬 넓은 부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싱벨리어 인근 농장은 고전적 아이슬란드 양식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현대적 건축물이며, 오늘날에는 아이슬란드 대통령의 별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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