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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 독일 나치 강제 수용소 및 집단 학살 수용소(1940~1945) [Auschwitz Birkenau German Nazi Concentration and Extermination Camp(1940~1945)]

  • 제목 :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 독일 나치 강제 수용소 및 집단 학살 수용소
  • 설명 : © UNESCO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 독일 나치 강제 수용소 및 집단 학살 수용소(1940~1945)

상세정보

  • 국가 폴란드(Poland)
  • 위치 리틀 폴란드(마워폴스카) 주(Lesser Poland (Małopolska).Voivodship, 옛 비엘스코비아와, Bielsko-Biała)|||오시비엥침 시(Oświęcim County)
  • 좌표 N50 4 0|||E19 21 0
  • 등재연도 1979년
  • 등재기준

    기준 (vi) :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는 주요 사건, 살아 있는 전통, 사상, 신념, 그리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예술 및 문학 작품 등과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연관되어 있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는 나치 독일(1933~1945)이 계획적으로 유대인과 수많은 사람들을 집단 학살한 증거이며, 인간성에 반하여 자행된 범죄 행위의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이다. 이 수용소는 자유로운 행동과 사상을 억압하고 한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고 했던 나치 독일의 시도에 끔찍한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저항했던 강한 인간 정신을 기념한다. 이 유적은 유대인 대학살, 인종차별 정책, 인간의 야만성을 전 인류에게 상기시키는 주요 장소이다. 또한 인류 역사의 어두운 한때에 관한 기억이 모여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곳이자, 과격한 사상이나 인간 존엄성 부정이 가져올 수많은 위협과 비극에 대한 경고의 장이기도 하다.

요약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Auschwitz Birkenau)는 독일 제3제국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소였던 곳이다. 수용소의 요새화된 벽, 철조망, 발사대, 막사, 교수대, 가스실, 소각장 등은 이곳에서 벌어졌던 대량 학살의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역사적인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가 유대인이었던 1,500,000명의 수용자가 이곳에서 체계적으로 굶주림과 고문을 당한 뒤 살해되었다. 이는 20세기에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잔인한 역사를 상징하고 있다.
목차
특징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는 나치 독일이 설치한 6개의 강제 수용소 중 가장 중요하고 악명 높은 곳으로, 유럽 지역의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고자 했던 이른바 ‘최종 해결(Final Solution)’을 하기 위한 곳이었다. 이 수용소는 원래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 독일이 폴란드인을 수용하려고 세운 곳이었으나, 구 소련의 전쟁 포로를 포함한 다른 나라의 사람들도 수용하게 되었다. 이곳은 1942년~1944년에 유대인들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문과 살인을 당한 현장이었다.

1,000,000명 이상의 유대인 성인 남녀와 어린이들, 그리고 수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 인들이 대량 학살당했다. 또 수천 명의 집시와 떠돌이를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 출신 죄수들도 이곳에서 인종 차별적 살인을 당했다. 유대인을 강탈하고 멸시하며 멸종시키려 했던 나치의 정책은 제3제국이 퍼뜨린 인종 차별과 반유대주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는 나치 독일이 세운 강제 수용소 중 규모가 가장 컸다. 이곳에서는 인종 말살과 강제 노역이 함께 행해졌다. 막대한 착취와 고통의 중심지였던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와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비르케나우) 및 그 보호 구역은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었다. 이곳은 소위 열등한 집단의 인간 존엄성을 부정하고 체계적인 살인을 자행한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고 조직적인 증거이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나치의 인종 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 정책의 흉악함을 생생히 증명하고 있다. 소각장에서는 1,200,000구가 넘는 시신(유대인이 90%이다)을 소각했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의 요새화된 벽, 철조망, 철로, 발사대, 막사, 교수대, 가스실, 소각장 등은 나치스 독일의 대량 학살과 강제 노역 정책뿐만 아니라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난 과정을 똑똑히 보여 준다. 이 유적에 보존되어 있는 물건들은 학살이 일어난 체계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계획적인 살인의 희생자들에 관한 증거를 보존하고 있다. 소장품 중 개인용품들을 통해 강제 수용소에 끌려오기 전에 희생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아울러 그 소지품과 유해가 얼마나 경멸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유적과 경관은 불필요한 복구 작업을 거치지 않고 본래 흔적들이 세심하게 보존되었기 때문에 진정성과 완전성의 수준이 매우 높다.

참고번호
31
본문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는 20세기에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했던 잔혹함을 상징한다. 수백만의 성인 남녀와 어린이들이 저항하고 희생당했던 이곳은 일반적 의미의 역사 박물관이 아니며, 인간성에 반하여 자행된 최악의 범죄 행위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이다. 1947년 박물관을 설립할 당시의 상태가 그대로 보존되어 온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의 수용소 벽, 철조망, 발사대, 막사, 교수대, 가스실, 소각장 등은 나치가 집단 학살을 자행했던 상황들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다.

이 수용소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공동묘지라고 할 수 있다. 24개국의 다른 나라에서 온 4,000,000명의 사람들(수많은 유대인을 포함)이 이곳에서 체계적으로 굶주림과 고문, 살인을 당했다. 나치스 친위대가 사용한 방식들과 그 효율성은 문서, 사진, 기타 증거물로 알 수 있다.

강제 수용소는 나치가 1940년에 오시비엥침 시의 교외에 세웠다. 그곳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이 점령하고 있었다. 오시비엥침 시는 나중에 독일어인 ‘아우슈비츠’로 바뀌었고 이것이 수용소의 이름이 되었다. 이후 수용소는 더 넓어져 3개의 주요 구역으로 나누어졌다. 가장 오래된 첫 번째 구역은 ‘주(主) 수용소’라고 불렀으며, 후에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로 알려졌다. 주 수용소는 전쟁 전에 폴란드의 군대 막사로 쓰던 건물과 토지에 만들어졌으며, 수용 인원은 20,000명을 넘기도 했지만, 보통 15,000명 전후였다.

두 번째 구역은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로 알려진 비르케나우 수용소이다. 이곳에 1944년 당시 유대인, 폴란드 인, 집시, 기타 국적자로 이루어진 90,000명 이상의 죄수들이 수용되었다. 아우슈비츠 전체에서 가장 큰 구역으로, 막사는 대개 나무로 엉성하게 만들었다. 나치는 1941년 오시비엥침에서 3㎞ 떨어진 브제진카(Brzezinka) 마을의 주민들을 퇴거시킨 뒤 그 가옥들을 압수하여 철거하고 이 수용소를 짓기 시작했다. 대량 학살 장비들 대부분이 비르케나우에 설치되었고, 희생자의 대다수가 이곳에서 숨졌다.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 곳곳에는 지금도 인체를 소각하고 남은 재로 가득하며, 아우슈비츠 유적은 대부분 이곳에 있다. 수용소의 유일한 목적은 인간 말살이었다. 광막한 공간, 죄수용 막사, 건물들의 폐허와 잔해, 길게 이어지는 담장과 도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극도의 비열함, 잔인함, 죄악을 생생히 느끼게 해 준다.

아우슈비츠의 세 번째 구역은 부나(Buna) 보조 수용소로, 1943년 11월에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가 되어 다른 보조 수용소들을 관할하게 되었다. 아우슈비츠에는 보조 수용소가 40개 이상 있었다. 처음에는 아우슈비츠에 폴란드 인들만 갇혀 숨졌지만, 후에는 구 소련 전쟁 포로와 집시 및 다른 국적의 사람들도 이곳에 감금되었고, 1942년부터는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계획의 일환으로서 유럽 지역 유대인들에게 자행되었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학살이 벌어지게 되었다.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유대인 성인 남녀와 어린이들의 과반수가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비르케나우의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나치 친위대는 자신들이 저지른 범행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가스실, 소각장, 다른 건물들을 허물어 없애고 문서들을 소각하기 시작했다. 행군이 가능한 죄수들은 독일로 후송되었다. 수용소에 남겨진 이들은 1945년 1월 27일 구 소련의 적군(赤軍)에 의해 풀려났다. 1947년 7월 2일 폴란드 의회법을 통해, 남아 있는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와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비르케나우)의 지대 위에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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