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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비에호의 고고 유적과 파나마 역사 지구 [Archaeological Site of Panamá Viejo and Historic District of Panamá]

  • 파나마 비에호의 고고 유적과 파나마 역사 지구
  • 제목 : 파나마 비에호의 고고 유적과 파나마 역사 지구
  • 설명 : © UNESCO / Author : Jim Williams
파나마 비에호의 고고 유적과 파나마 역사 지구

상세정보

  • 국가 파나마(Panama)
  • 위치 파나마 주(Panama’ Province)|||파나마 지구(Panama’ District)
  • 좌표 N8 57 4|||W79 32 26
  • 등재연도 1997년(2003년 확장)
  • 등재기준

    기준 (ⅱ)(ⅳ)(ⅵ) : 파나마가 1519년에 아메리카 대륙 태평양 해안의 첫 유럽 정착지였음을 고려한 것이다. 이곳의 역사구역은 도로 형태와 초기 정착지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많은 초기 가옥 건물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살롱 볼리바르는 역사적 매우 중요한 곳으로, 시몬 볼리바르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1826년에 범아메리카 회의가 개최되었던 장소이다. 이 기구가 실현되기까지는 1세기가 넘게 걸렸다.

요약
파나마 비에호(Panamá Viejo)는 정복자 페드로 아리아스 데 다빌라(Pedro Arias de Davia, 일반적으로 ‘페드라리아스’라고 부름)가 1519년에 세운 곳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태평양 해안에서 가장 오래된 유럽인 정착지다. 격자형 설계(rectilinear grid)하여 유럽 계획도시의 개념을 적용했다. 17세기 중반 해적의 침입 등으로 인해 시민들은 멕시코 등의 다른 아메리카 지역이나 에스파냐로 떠나버렸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이곳을 불태우고 ‘신도시’(역사 지구)로 옮겨갔다. 이 신도시에도 원래 도로 계획과 건축물이 보존되어 있고, 건축물은 에스파냐와 프랑스, 초기 아메리카 양식이 혼재해 있다. 또 다른 유적지인 살롱 볼리바르(Salón Bolívar)는 1826년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운동가인 시몬 볼리바르(Simon Bolívar)가 ‘범아메리카 회의’의 설립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던 장소이다.
목차
역사적 배경

파나마(현재는 파나마 비에호)라는 이름의 첫 정착지는 에스파냐의 정복자 페드라리아스가 1519년에 세웠다. 이 정착지는 태평양 해안을 따라가는 첫 탐험의 출발지였다. 1513년에 바스코 발보아(Vasco Nunez de Balboa)가 처음으로 이곳을 발견했다. 파나마에는 원래 약 400명의 정착민들이 70여 채의 오두막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정착민들은 대부분 1532년 페루 정복이 끝나자 페루로 이주했다. 이듬해까지 파나마에는 13명의 에스파냐 남성 정착민들이 500여 명의 원주민들과 함께 남아 있었다.

그러나 파나마는 태평양 해안의 종점이었으며, 에스파냐와 아메리카 대륙 간 대륙횡단로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서양 해안의 종점 역할은 처음에는 놈브레 데 디오스(Nombre de Dios)였고 이후에는 포르토벨로(Portobello)였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세 번째로 왕립 아우디엔시아(Real Audiencia, 고등사법재판소)가 설치된 사실을 통해 이 도시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산토도밍고와 멕시코시티 다음이다). 이 도시는 1621년 지진과 1644년 화재로 황폐해졌다. 1671년에는 해적 헨리 모건(Henry Morgan)의 침략으로 도시는 불타고, 몇몇을 제외하고 주민들 대부분은 이 도시를 떠났다. 헨리 모건은 3년 전에는 포르토벨로도 점령했던 인물이다.

인근 작은 반도에 새로운 정착지가 생겼고, 이전 정착지에는 없었던 요새도 건설했다. 파나마 비에호의 다듬은 돌을 재사용했고, 라 메르세드(La Merced)와 같이 교회의 외관 전체가 새로운 장소에서 재건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 도시는 쇠퇴를 맞이했다. 이 도시는 고지대 페루의 금괴를 플라테 강(River Plate)을 통해 에스파냐로 운반하기 시작할 즈음부터 금의 이동로로서 전략적 중요성을 잃었다. 왕립아우디엔시아를 폐쇄하고 포르토벨료 박람회도 취소했다. 1737년과 1756년, 1781년에는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다.

파마나가 1821년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하던 당시 인구는 5,000여 명에 불과했다. 1826년 독립운동가 시몬 볼리바르는 모든 아메리카 대륙의 신생 독립국을 파나마 인보동맹회의(Amphictyonic Congress)에 초청했고 페루와 콜롬비아, 중앙아메리카, 멕시코의 사절단이 미국과 영국, 네덜란드 대표자들과 함께 참석했다.

이 회의는 1821년에 지역 공동체가 버린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의 사제단 회의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사제단 회의장은 이후 1904년 첫 입헌회의가 열린 장소였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철도로 북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하지 않고 배로 캘리포니아로 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지협으로 가서 파나마를 횡단하려 했기 때문에, 이 유적지는 잠깐 동안 호황을 누렸다. 1870년 이 도시의 인구는 10,000명에 달했고 19세기 말까지는 인구가 다시 25,000명으로 증가했다.

1903년 파마나가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을 하고 미국이 대운하 사업에 착수하면서 이 지역은 분수령을 맞이했다. 도시는 거대하게 팽창했고 더 가치 있는 재산은 외부 구역에 있었으므로, 역사 중심지는 어쩔 수 없이 쇠퇴했다. 1950년까지 대부분 가옥에는 여러 세대가 살았다. 그렇지만 역사 지구에는 파나마 정부의 소재지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대통령과 여러 부처는 아직도 이 역사 지구에 있다.

유산면적
57㏊
참고번호
790bis
본문

레온 비에호 유적은 유럽의 태평양 발견과 에스파냐의 영토 확장, 약탈의 역사, 황금을 유럽으로 옮기기 위한 ‘불리언 라이프라인(bullion lifeline)’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도시의 구조를 통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류를 알 수 있으며, 건물은 식민시대 에스파냐 사회발달의 의미 있는 단계를 잘 나타내 준다.

파나마 비에호의 유적은 1519년에 세워진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유럽식 도시 유적이다. 1673년 카스코 안티구오(Casco Antiguo)로 도시를 이전한 후 버려져 복원되지 않았다. 이곳에는 당시의 거리와 광장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은 공원으로 사용하며, 성당과 교회, 수리 시설, 시청, 개인 가옥 등 인상적인 유적이 남아 있고,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인 1000년 이전의 오랜 유적지 일부가 발굴되어 유품들이 현지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구도시는 1519년에 페드라리아스가 세웠다.

이 도시는 곧 중요한 항구로 발전하여 왕실 재판소가 설치되고 상업과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곳 기후가 건강에 해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도시는 과테말라나 보고타처럼 큰 도시로 발전하지 못했다. 구도시는 1672년에 화재로 파괴되었고 남아 있던 시민들은 1년 후 남서쪽으로 8㎞ 떨어진 신도시로 옮겨갔다.

구도시는 국유지로 남아 있었고 1949년경 북쪽 변두리에 새로운 마을이 생겼으나 이 마을로 인한 문화유적 보존에는 큰 영향이 없다. 파나마는 1519년에 생긴 아메리카 대륙 태평양 해안의 첫 유럽인 정착지였고, 역사 지역은 초기 정착지의 특성이 있는 거리 형태와 초기 가옥 건물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살롱 볼리바르는 시몬 볼리바르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1826년에 범아메리카 회의를 개최했던 장소로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그러나 이 기구가 실현되기까지는 1세기가 넘게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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