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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란후에스 문화경관 [Aranjuez Cultural Landscape]

  • 아란후에스 문화경관
  • 제목 : 아란후에스 문화경관
  • 설명 : © UNESCO / Author : Yvon Fruneau
아란후에스 문화경관

상세정보

  • 국가 스페인(Spain)
  • 위치 마드리드 주 및 마드리드 자치지방(Province and Autonomous Community of Madrid)
  • 좌표 N40 2 11.22|||W3 36 33.624
  • 등재연도 2001년
  • 등재기준

    기준(ⅱ) : 아란후에스는 다양한 문화 사조가 한데 어울려 새로운 하나의 문화경관을 창조한 사례이다. 이 문화경관은 이후 이 분야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기준(ⅳ) : 복잡하게 설계된 아란후에스 문화경관은 그 유래의 출처가 다양하며, 조경 설계의 발달에서 중요한 단계를 나타낸다.

요약
아란후에스(Aranjuez) 문화경관은 자연과 인간의 활동, 구불구불한 수로와 기하학적 계획에 따라 설계한 조경 구조, 전원과 도시, 궁전 등의 건물들을 섬세하게 조율한 건축과 숲 경관 사이에 나타나는 다양한 연관성 등이 총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왕가(王家)에서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며 아란후에스 경관을 개발하고 보호해 온 300년 동안, 인본주의와 중앙집권 정치체제에서부터 시작해 18세기 바로크 양식의 프랑스 스타일 정원에서 보이는 특성과 계몽주의 시대에 식물의 환경기후 적응과 축산업 발전 등에 발맞추어 발전한 도시적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고의 변화를 이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목차
역사적 배경

아란후에스 지역은 로마 시대에 전략 요충지로 부상하기 이전부터 인간이 이미 오랜 시간 정주해 온 역사를 누려 왔다. 강이 가로지르고 길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기 때문에(그래서 영향력이 배가되었음), 당시의 정치지리적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으로 남아 있다가, 마침내 중세 시대에 국왕이 산티아고(Santiago)의 성 하메스(St. James) 종교기사단에 하사했다. 14세기 말엽에 기사들이 숲 한가운데에 궁전을 하나 세우고, 이곳에 사냥감을 풀어놓았다.

아란후에스는 15세기에 왕실 소유지가 되었으나, 첫 번째 영광의 시대를 창조한 것은 16세기의 펠리페 2세였다. 그는 새로운 궁전을 짓고, 기하학 원칙에 따라 장식성을 높여 대규모 정원과 채마밭을 배치했다. 중앙집권 국가를 중심으로 하여 세계로 뻗어 나가는 황제의 주권을 상징하고, 동시에 인본주의라는 규범에 따른 인간의 우월성과 자체 구조물인 자연으로의 회귀를 자축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은 또한 사적인 개인 은둔처였다. 펠리페 2세는 식물학을 실험하고, 세계 각지에서 식물 종자를 수입했으며, 유럽 중부와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 적용하는 수리공학을 도입했다. 17세기에 아란후에스는 왕실 가족이 1년에 한 번 머무는 거처로, 화려한 왕실 행사와 사냥을 위한 궁전으로, 황금시대에 위대한 스페인 시인들을 후원하고 영감을 제공하는 원천으로서 번성했다.

18세기까지 지속되던 영광은 궁전 가까운 지역에 새로운 마을을 건설함으로써 정점에 이르렀다. 카를로스 3세(Carlos Ⅲ) 치하에서 도시와 인근 지역은 계몽주의의 심장부에 놓인 중농주의, 농업, 과학, 사회사상의 실험장이 되었다. 왕은 원예학을 적용하고 농장 모델을 디자인하는 데 좋은 사례를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사상과 나폴레옹의 야망이라는 외부 압력, 세기말에 스페인의 구체제에 종말을 고하며 발생한 아란후에스 폭동 때문에 이러한 문화의 영광은 사실상 시들고 말았다.

19세기 초엽에 아란후에스 왕실 소유지에 모더니즘과 절충주의 요소를 더하면서 짧은 부활의 시기를 거친 후에 이사벨라 2세의 치세가 막을 내리자, 강변의 단지와 마을 역사에서 국왕이 독점해 담당하던 역할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왕의 명령과는 독립적으로 시 의회가 수립되었고(1836), 왕가는 더 이상 아란후에스를 이용하지 못했다. 1868년 혁명 이후에 국왕이 보유한 모든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었다.

아란후에스의 상당 부분이 처음에는 국가에 귀속되지 않았으나, 1870년대 초엽에 왕실에게 남은 것은 예전 부지의 파편들뿐이었다. 그 사이 인구가 증가하고 철도가 놓임에 따라(1851년) 활발한 경제적 활동이 자극을 받았으나, 그 대가로 궁전의 동쪽 경관이 절단되고, 피코타호(Picotajo) 정원으로 반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20세기에 아란후에스는 인구밀도가 높은 마드리드의 위성도시이자 산업과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왕실 소유지에 대한 기억과 유지도 쇠퇴했다. 이러한 상황 변화에도 불구하고 완전성을 유지하고 있는 유적지에 대해 20세기가 끝날 무렵 새로운 평가와 정책, 프로그램이 제안되었으며, 이는 아란후에스 왕실 소유지를 바라보는 새로운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유산면적
2,048㏊
완충지역
16,605㏊
참고번호
1044
본문

복잡하게 설계된 아란후에스 문화경관은 그 유래의 출처가 다양하며, 조경 설계의 발달에서 중요한 시기를 나타낸다. 아란후에스는 다양한 문화 사조가 한데 어울려 새로운 하나의 문화경관을 창조한 사례이다. 이 문화경관은 이후 이 분야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아란후에스는 오랜 세월 동안 특정 문화 영역에서 다양한 문화가 교체되었다는 증거이며, 이는 랜드마크(landmark, 주요 지형지물)로서의 발전과 조경 창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란후에스는 특정 문화를 해당 지역에 조성하는 모델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온 궁정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짐에 따라, 이 도시는 외부의 위협에 점점 더 취약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이 지역은 로마 시대에 전략 요충지가 되기 훨씬 전부터 인간의 정주가 시작된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는 두 줄기의 강(타호(Tajo) 강과 하라마(Jarama) 강)이 서로 가로지르고, 남쪽의 마드리드(Madrid)와 북서쪽의 톨레도(Toledo)를 연결하는 교차점에 있기 때문이었다.

14세기 말엽에 가까웠을 때, 기사들이 숲 한가운데에 궁전을 하나 짓고 영지 안에 사냥감을 풀어 놓았다. 하지만 진정한 영광의 첫 시대를 창조한 것은 16세기의 펠리페 2세(Felipe Ⅱ)였다. 그는 새로운 궁전을 짓고 거대한 채소밭들을 기하학 원칙에 따라 장식성을 살려 배치했는데, 당시 이곳은 사유지이자 개인 은둔처였다. 17세기에 아란후에스는 왕실 가족이 1년에 한 번 머무는 거처로, 화려한 왕실 행사와 사냥을 위한 궁전으로, 황금시대에 위대한 스페인 시인들을 후원하고 영감을 제공하는 원천으로서 번성했다.

18세기까지 지속된 전성시대는 궁전 가까운 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정점에 이르렀다. 19세기 초엽에 아란후에스 왕실 소유지에 모더니즘과 절충주의 요소를 더하면서 짧은 부활의 시기를 거친 후에 이사벨라(Isabella) 2세의 치세가 막을 내리자, 강변의 궁전 단지와 마을의 역사에서 왕실이 독점해 차지하던 역할도 종말을 고했다. 1868년 혁명 당시에 국왕 소유의 모든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었다. 1870년 초엽에는 인구가 증가하고 철도가 부설됨(1851)에 따라, 경제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그 대가로 궁전의 동쪽 경관이 절단되었고, 피코타호(Picotajo) 정원이 두 동강 났다.

20세기에 아란후에스는 인구밀도가 높은 마드리드의 위성도시이자 산업과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 변화에도 불구하고 유적지는 완전성을 유지하고 있다. 지역 전체는 지나치게 토지를 착취하고 기후와 지형 때문에 초목이 거의 살지 않는 건조한 황갈색의 시에라(Sierra) 산맥과 같은 경관 속에서 초록의 오아시스처럼 보인다.

이 지역은 계획도시, 거대한 정원, 채마밭, 과수원, 석호, 강과 수로, 숲, 황야가 통합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궁전과 광장을 중심으로 배치한 섬의 정원이다. 동쪽에는 형태가 불규칙한 왕의 정원이 분수와 함께 있다. 결국 철도에 의해 단절된 가로수 길과 풍경, 수로가 있는 서쪽을 가로질러 매우 심하게 굽은 강 안쪽에 조각 정원과 분수대가 있는 북쪽을 지나면, 기하학에 바탕을 두고 분수대와 여러 구조물을 가득 채운 섬의 정원이 있다. 위대한 역사의 정원은 모두 모이면 상당한 규모의 지역을 포괄하는 여러 개의 정원으로 구성된다.

마을 지역은 궁전 서쪽에 있는 정원들과 기차역을 아우르는 궁전 서쪽의 산업 지역, 그리고 지금은 현대적인 아란후에스 역사의 핵심 지역이 된 18세기 마을로 양분된다. 마을 배치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18세기 말엽에서 19세기 초엽에 조성한 왕자의 정원이 마을 북동쪽에서 타호 강 남쪽 강둑을 따라 뻗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강과 댐, 도랑, 샘으로 구성된 문화경관을 창조하는데, 개념이 통합되어 있어 일련의 경관 속에 딱 들어맞는다.

채원, 과수원, 사육장과 축사가 전원 경관을 구성하고, 각각의 정원들은 매력이 넘치는 경관을 형성한다. 펠리페 2세의 웅장한 배치로 시작된 기하학은 다른 요인들에도 분명히 일정한 역할을 했지만, 수력 장치에도 일부분 영향을 미쳤다. 아름답게 꾸미려는 기하학 원리에 따라 특정 지점에 설치한 많은 연못과 샘에 물을 대는 데는 수문학이 적용되었다. 인공 경관은 도로, 건축물, 마을로 구성된다. 이 유적지의 자연과 기하학 토대는 비교적 손실된 부분이 없으며, (근대적인 교통로를 제외하고) 사실상 크게 침범된 부분이 없었기 때문에 전체가 놀랍도록 잘 보존되어 있다. 주요 건축물과 도시 배치, 정원, 나무가 늘어선 길이 기본 계획에 따라 조성된 과수원과 숲 사이에서 도시 공동체의 특징으로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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