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세정보
국가 : 벨기에(Belgium)
위치 : 왈로니아 지역(Wallonia Region) 에노 주(Province of Hainaut)
좌표 : N50 36 21.708, E3 23 21.336
등재연도 : 2000년
요약
투르네의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Cathedral in Tournai)은 12세기 초반에 건설되었다. 특별한 규모의 신랑(身廊, nave)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나 트랜셉트(transept)에 장식된 조각과 5개의 탑은 고딕양식의 특징을 지녔다. 고딕양식이 중세시대에 풍미하기 이전에 나타난 고딕 양식의 시초로 특별한 기품이 있다. 13세기에 재건축된 성가대석은 순수한 고딕 양식이다.
영문명
Notre-Dame Cathedral in Tournai
등재기준
기준 (ⅱ) : 투르네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고딕 건축이 꽃피우기 전 12세기 초반 동안 일 드 프랑스, 라인란트와 노르망디 지역의 건축에 영향을 끼친 상당한 특징과 면모를 보여 준다.
기준 (ⅳ) : 센 강 북쪽 학파들이 남긴 위대한 건축물의 뛰어난 사례인 투르네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위대한 고딕 대성당들의 시초로, 두드러지는 특징이 눈길을 끈다.
역사적 배경
기원전 1세기에 투르네는 에스코 강에서 여러 도로가 연결되어 있는 교차점에 있어서, 이미 로마 시대에 중요한 행정과 군사 중심지였다. 성 피아트에 의해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 초기에 기독교가 투르네에 전해졌으나, 프랑크 왕 힐데리히가 집권할 때였던 6세기까지 주교 관할권이 형성되지 않았다. 피레네 산맥까지 왕국을 확장한 이후 그의 아들 클로비스(Clovis, 481~511)는 투르네에서 파리로 왕의 거주지를 옮겼다. 주교 거주지가 성 스테판 성당(Cathedral of St Stephen)과 성모마리아 성당(church of St Mary) 주변으로 확장되었으며, 카롤링거 왕조 하에 이 도시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그리고 지적 삶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성당은 9세기 중반 주교지가 화재로 파괴되면서 12세기 초에 건축되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11세기 대성당은 1089년 전염병이 발병하자 성모마리아회에서 순례자들이 찾아와서 규모가 더욱 커졌다.(‘병자들의 어머니’, 그외에 투르네의 노트르담 또는 플라망의 노트르담) 또한 모(wool)를 생산하고 석회석을 수출하는 곳으로 지역적으로 부유한 편이었다. 투르네는 이런 경제기반 아래 종교와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투르네 교구는 누아용(Noyon) 교구에서 분리 독립 교구가 됨으로써 보다 활발한 건축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성당의 로마네스크적인 요소는 확실하게 날짜를 추정할 수 없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12세기 초에 건축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신랑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12세기의 ⅓ 시기에 건축되었고 트랜셉트는 12세기의 ⅔ 시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한다. 원래 계획은 아치형 천장이 있는 측면 복도에 거대한 갤러리와 천장이 있는 신랑과 조화로운 서쪽 앞면을 포함하고 있었다. 고딕 성가대석은 오를레앙의 에티엔 주교(Bishop Etienne d’Orleans, 1192~1203)가 성 빈센트 성당을 남서쪽에 건축하도록(1192~1203) 했고, 1198년 성당의 트랜셉트와 성가대석에 아치형 천장이 더해진 후 건물이 완성되었다. 13세기 초기에 첫 번째 로마네스크 정문이, 다음 세기 초에 석조 현관으로 생김으로써 더욱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되었다.
마비스의 고티에르 주교(Bishop Gautier de Marvis, 1219~1252)는 새로운 성당을 건설하고자 계획했다. 작업은 1242년 성가대석에서부터 시작되어 1255년 끝났으나 로마네스크 신랑과 트랜셉트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른 건축물들이 추가 건축되었다. 1299년 프랑스의 루이 9세(Louis IX)에게 봉헌된 남쪽 복도의 고딕 성가대석이 추가되었고, 14세기에는 성가대석에 기도실(prayer-chapel)이 추가되었다. 이 시기부터 고딕 성가대석은 심각하게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각기 다른 시기에 강화 작업을 하였다. 성가대석이 완성됨으로써 로마노 고딕 성당(Romano-Gothic Cathedral)은 투르네에서 오랜 세기 동안 예술작품을 기부 받는 등 예술적인 창조 환경으로부터 혜택을 누렸다. 측면 종루의 첨탑과 중앙 탑의 첨탑은 16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보이며, 한때 로마네스크 회랑 유적 부근 신랑의 북쪽 면에 있던 교구 교회 역시 16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교구교회는 사라져서 현존하지 않는다.
투르네는 칼뱅주의(Calvinism)의 발흥을 막을 수는 없었다. 투르네는 1559년 브루게(Brugge)와 겐트(Ghent)의 부주교 위치를 잃었고, 1566년에는 성당이 약탈되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성당은 다음 해에 복구되었으며, 향후 2세기 동안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여기에는 나르텍스(narthex)의 토스카니 스타일로 부분 재건축(1620), 신랑 갤러리에 목재 천장을 대체하여 올린 새로운 아치형 천장(1640 이후), 신랑의 대체(1753), 측면 복도의 서쪽 기둥 사이 공간에 있는 로마네스크 계단의 수정(1757) 등이 포함된다. 또한 나르텍스로 열려 있는 측면 아케이드를 막고 측면 복도로 새로운 문을 열었다.
1797년 프랑스 인들이 다시 돌아와 성당을 폐쇄하였다. 그 결과, 소장했던 많은 가구들과 예술품을 팔아야 했다. 철거 직전까지 갔던 이 건물은 복구를 하게 되었고, 1840년 성가대석에서 시작하여 이후 계속 복구되었다. 복구 작업은 이미 재건축된 남쪽 애프스와 맞추기 위해 북쪽 애프스의 박공벽을 재건축 하는 것, 트랜셉트 갈래의 박공벽에서 영감을 받아 전성기 로마네스크 박공벽을 재건축하는 것, 위대한 장미창을 만드는 것 등이었다.
19세기 초 주변 거주지들이 철거되자 성당은 외따로 남았다. 1940년 5월 17일에는 성가대석에 소이탄이 떨어져 신랑의 천장까지 불길이 번졌다. 이 결과 교구 교회, 주교 궁전, 감독관구의 기록 보관소, 상당한 규모의 지부 도서관이 모두 파괴되었다. 새로운 복원 캠페인은 전쟁이 끝난 후 시작되었다.
유산면적
0.50㏊
참고번호
1009
본문
투르네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고딕 양식 건축이 꽃피기 전 12세기 초반에 잠시 동안 일 드 프랑스(Ile de France), 라인란트(Rhineland)와 노르망디(Normandy) 지역의 건축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 준다. 신랑과 파사드의 경우 초기에 4층으로 올렸고 이후 확장했으며 복도에 트리포리움(triforium)을 설치하여 이례적으로 트랜셉트를 강화했다. 4층 높이에 구름다리 구조로 신랑을 설치한 것은 12세기 초 교회 건축을 3층으로 제한했던 당시 상황에서 볼 때 독특한 면이다. 규모면에서 눈길을 끄는 투르네 성당은 고딕 성당들의 시초라 할 만하며 센강 북쪽 학파의 위대한 건축물 중에 하나이다. 신랑과 트랜셉트는 당시 지역에 있는 로마네스크 시대 또는 사르트르 이전 고딕시대의 성당 건축에서는 거의 사라진 형태이다.
이는 신랑 부분에 새겨진 장식부분에서 더욱 그렇다. 이것은 고고학적으로 이례적인 가치가 있어서 성당을 특별한 관점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기원전 1세기에 투르네는 에스코(Escaut) 강에서 여러 도로가 연결되어 있는 교차점에 있어서, 이미 로마의 중요한 행정과 군사 중심지(투르나쿰, Turnacum)였다. 성 피아트(St Piat)에 의해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 초기에 투르네에는 기독교가 전해졌으나, 프랑크 왕 힐데리히(Childeric)가 집권할 때였던 6세기까지 주교 관할권이 형성되지 않았다.
이 성당은 9세기 중반 주교지가 화재로 파괴되면서 12세기 초에 건축되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11세기 대성당은 1089년 전염병이 발병하자 성모마리아회에서 순례자들이 찾아와서 규모가 더욱 커졌다. 성당은 오래된 도시의 중심부에 있으며, 에스코 강의 왼쪽 제방에서 멀지 않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건축학상으로 3가지 양식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네스크 신랑, 고딕 성가대석, 그리고 이와 연결되어 있는 5개의 종탑이 있는 전환기 양식의 트랜셉트가 그것이다. 외부에는 고딕 양식의 현관이 서쪽 앞부분에 2개의 정문을 보호하고 있다. 건물 앞부분에서 아랫부분은 서로 다른 시기로 추정할 수 있는 구약 장면, 도시의 역사상 사건, 그리고 성인들을 표현하는 조각들로 꾸며져 있다(14, 16, 17세기).
그 위에는 위대한 전성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장미창이 있는 사이사이를 기둥으로 구획했으며, 2개의 기둥으로 꾸며진 원형 탑으로 측면을 장식한 박공지붕이 있다. 성가대석은 13세기에 재건축된 것으로 순수한 고딕 스타일이다. 내부에 있는 48m 길이의 로마네스크 신랑은 9개의 경간(徑間)으로 나뉘어 있으며, 복도 옆에 배치되어 있다. 이곳은 수평의 연속된 케이블로 설계되어 있으면 4층 높이로 올려져 있어 독창적이다. 2개의 로마네스크식 아치형 천장이 있는 방들은 아마도 교회였을 것으로 보이며 신랑이 건축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추가되었다. 한 개의 방은 북쪽에 있고, 또 다른 한 개의 방은 남쪽에 있으며 트랜셉트에서 갈라져 반대편 통로를 지나 서쪽 갤러리를 돌면 그곳에 있다.
트랜셉트에는 아치형 천장이 있으며 두 갈래는 각자 2개의 탑에 의해 그 형태가 지어진 좁은 주랑이 있는 애프스로 연결된다. 직사각형의 교차점에는 등이 있으며 고딕 양식의 아치 위로 2층이 훤히 보이게 되어 있다. 신랑을 높인 것은 여러 갈래로 확장되어 있으며, 첨두아치가 있는 천장을 포함하고 애프스를 높이는데 순차적으로 이전하기 위해 필요한 조정을 했다. 성가대석은 긴 쪽에 따라 첨두아치가 있는 천장이 있는 7개의 갈래로 확장되어 있으며 팔각형의 천장으로 덮여져 있는 반 십각형으로 마감되어 있다. 교회는 주랑 쪽으로 열려 있으며 에프스에 6개의 삼면의 방사형 교회를 포함하고 있다